지훈은 습관적으로 어깨를 짓누르는 피로감을 느끼며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섰다. 가로등 불빛이 드문드문 켜진 단지 내부는 기괴할 정도로 고요했다.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무거웠고, 머릿속은 온통 텅 빈 거실의 적막으로 가득 찼다. 아내가 떠난 뒤, 그에게 남은 것은 먼지가 내려앉은 가구들과 함께 나누지 못한 대화들의 잔상뿐이었다. 그는 낡은 아파트의 콘크리트 외벽이 뿜어내는 서늘한 냉기를 느끼며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낡은 기계 장치가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며 멈춰 섰고, 지훈은 무표정한 얼굴로 내부로 발을 들였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생기를 잃은 채 창백했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층의 버튼을 눌렀다. 버튼의 불빛이 희미하게 깜빡였지만, 엘리베이터는 평소보다 느릿하게 상승하기 시작했다. 폐쇄된 공간 속에서 들려오는 것은 오직 기계의 마찰음과 자신의 불규칙한 숨소리뿐이었다. 지훈은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오늘 하루 동안 누구와도 제대로 된 말을 섞지 않았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그를 짓눌렀다. 그는 아내의 부재가 주는 상실감에 익숙해졌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매 순간 그 공허함에 잠식당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층수를 알리는 숫자를 바꾸며 위로 올라갔지만, 어느 순간부터 기묘한 진동이 발끝에서부터 전해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엘리베이터가 거칠게 요동쳤다. 쇳덩이가 서로 맞물려 긁히는 듯한 날카로운 소음이 좁은 공간을 메웠고, 지훈은 반사적으로 벽면의 손잡이를 꽉 잡았다. 전등이 몇 번 깜빡이다가 완전히 꺼졌다가 다시 켜지기를 반복했다. 당황한 지훈이 조작판의 버튼들을 마구 눌렀지만, 기계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러다 덜컥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완전히 멈춰 섰다. 디지털 표시창에 뜬 숫자를 본 지훈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숫자 '14'. 이 아파트는 13층 건물이었다. 14층이라는 공간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지훈은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서늘한 전율을 느꼈다. 단순한 기계 오작동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상황이 너무나 이질적이었다. 그는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초조하게 발을 굴렀다. 잠시 후, 육중한 금속 문이 천천히 양옆으로 갈라지며 외부의 풍경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곳은 그가 알던 아파트 복도가 아니었다. 조명은 희미하게 명멸하고 있었고, 공기는 마치 수십 년간 정체되어 있었던 것처럼 무겁고 눅눅했다. 벽지는 누렇게 변색되어 군데군데 뜯겨 있었으며, 바닥에는 정체 모를 검은 얼룩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는 내릴 생각이었지만, 본능적인 거부감이 그를 엘리베이터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이곳은 현실의 공간이 아닌, 누군가의 악몽 속으로 들어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훈은 무언가에 홀린 듯 엘리베이터 밖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복도는 길게 뻗어 있었고,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복도 끝, 희미한 전등 빛이 떨어지는 곳에 누군가 서 있었다. 지훈은 숨을 멈췄다. 멀리서 보이는 실루엣, 살짝 굽은 어깨선, 그리고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의 결까지. 그것은 지훈이 매일 밤 꿈속에서 그리워하던, 그리고 결코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라 믿었던 아내의 뒷모습이었다. 지훈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눈이 헛것을 보는 것이라고 부정하려 했지만, 그 형체는 너무나 선명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은 없었지만, 여자는 천천히 몸을 돌려 지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빛 아래로 드러나는 순간, 지훈은 숨 쉬는 법조차 잊어버렸다. 그것은 분명히 그의 아내였다. 피부의 투명함, 눈매의 곡선, 그리고 그가 사랑했던 입술의 모양까지 모든 것이 완벽하게 일치했다. 그녀는 슬픈 듯하면서도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지훈을 응시하고 있었다.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단절을 넘어, 그녀가 다시 자신 앞에 나타났다는 사실에 지훈은 극심한 혼란과 벅차오르는 그리움을 동시에 느꼈다. 그는 이것이 환상인지, 아니면 기적인지 판단할 수 없었지만, 오직 그녀에게 다가가고 싶다는 열망만이 뇌리를 지배했다.
지훈은 홀린 듯 그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다가갈 때마다 심장 박동 소리가 귓가를 때렸고, 주변의 풍경은 점점 흐릿해져 오직 그녀만이 세상의 중심인 것처럼 선명해졌다. 그녀는 마치 그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가만히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훈은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만지고 싶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알 수 없는 위압감이 그를 덮쳤다. 그녀의 미소는 다정했지만, 눈동자 속에는 생기가 없었다. 그것은 기억 속의 모습과 정확히 일치했지만, 동시에 살아있는 인간이라고는 믿기 힘든 정적인 완벽함을 띠고 있었다. 지훈은 전율했다. 그리움이라는 감정 너머로, 설명할 수 없는 이질감이 그의 피부를 스쳤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이곳에 있을 수 있는가. 그리고 왜 존재하지 않는 14층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그녀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그 모든 의심은 눈 녹듯 사라지고 오직 지독한 갈망만이 남았다. 그는 그녀의 이름을 다시 한번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 순간, 복도의 전등이 일제히 꺼졌다가 켜지며 강한 빛이 그들의 사이를 갈랐다. 지훈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여전히 그녀는 그곳에 있었지만, 이제는 그가 알던 아내보다 더 아내 같은 모습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훈은 극심한 혼란 속에서 그녀의 손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지훈의 떨리는 손끝이 그녀의 손등에 닿은 순간, 예상했던 서늘함이나 환영 같은 공허함은 없었다. 손가락 사이로 전해지는 온기는 지독하리만큼 생생했다. 여자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연스럽게 그의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손가락을 얽어맸다. 깍지 낀 손에서 느껴지는 압력과 피부의 질감은 그가 기억하는 아내의 그것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지훈은 숨을 멈춘 채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처연해 보여,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어 그녀를 끌어당겼다. 여자는 거부감 없이 그에게 몸을 맡겼고, 마치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이곳에서 그를 기다려온 사람처럼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왜 이곳에 있었는지, 어떻게 다시 돌아왔는지 묻기도 전에 여자는 고개를 살짝 까딱이며 열려 있는 엘리베이터 안을 가리켰다. 지훈은 홀린 듯 그녀의 손에 이끌려 다시 좁은 금속 상자 속으로 발을 들였다. 닫힘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옆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체온이 그 불안을 잠재웠다. 엘리베이터가 다시 하강하기 시작하자, 14층이라는 숫자가 사라지고 익숙한 층수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지훈은 그녀의 손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더욱 꽉 쥐었다. 꿈이라면 깨지 않기를, 환상이라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그의 온몸을 지배했다.
집 현관문에 도착했을 때, 지훈은 비로소 자신이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 노력했다. 하지만 문을 여는 순간 풍겨온 집안의 공기는 평소와 다름없이 적막했고, 그 적막을 깨고 들어온 그녀의 존재는 너무나 이질적이면서도 동시에 완벽했다. 여자는 익숙한 동작으로 구두를 벗고 거실로 들어섰다. 그녀가 발을 딛는 곳마다 죽어 있던 공간에 생기가 도는 착각이 들었다. 지훈은 현관문에 기대어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거실 테이블 위에 놓인 먼지 쌓인 화분을 발견하고는 작게 혀를 찼다. 그것은 아내가 살아생전 식물 관리를 소홀히 하는 지훈을 타박할 때 짓던 특유의 표정이었다.
"이것 봐, 내가 없으니까 집 꼴이 말이 아니네."
그녀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톤, 억양, 그리고 말끝을 살짝 올리는 습관까지 모두 그대로였다. 지훈의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너무나 그리웠던 목소리가 텅 빈 거실을 채우자, 그는 갑자기 밀려오는 감정에 휩싸여 그녀에게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짓는 미소가 너무나 완벽했기에, 그는 아주 찰나의 순간 멈칫했다. 그것은 마치 잘 짜인 각본대로 움직이는 배우를 보는 것 같은 기묘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녀가 돌아왔다는 사실 그 자체였고, 세세한 위질감 따위는 행복이라는 거대한 감정에 덮여 희미해졌다.
여자는 거실 소파에 앉아 자연스럽게 쿠션을 끌어안았다. 그것은 그녀가 가장 편안함을 느낄 때 하는 버릇이었다. 지훈은 그녀의 곁에 조심스럽게 앉아, 그녀의 얼굴 구석구석을 뜯어보았다. 눈가의 작은 주름, 콧날의 곡선, 그리고 입술의 미세한 떨림까지. 모든 것이 그가 사랑했던 아내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녀는 지훈의 시선을 느꼈는지 생긋 웃으며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왔다. 샴푸 향기가 났다. 그가 가장 좋아했던, 은은한 라벤더 향이 섞인 그녀만의 체취였다. 지훈은 눈을 감고 그 향기에 깊게 침잠했다. 상실감으로 인해 뻥 뚫려 있던 가슴 속 구멍이 빠르게 메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많이 보고 싶었어. 정말로."
지훈이 젖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자 여자는 그의 손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대답했다.
"나도 그랬어, 지훈 씨. 이제 다시는 어디 안 갈게."
그녀의 목소리는 다정했고, 그 속에 담긴 애정은 진심처럼 느껴졌다. 지훈은 그녀를 품에 꼭 껴안았다. 품 안에서 느껴지는 심장 박동이 규칙적으로 울렸다. 살아있는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그 리듬이 지훈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그는 이제야 비로소 지옥 같았던 혼자만의 시간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어떻게 돌아왔는지, 14층이라는 공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 이 순간, 자신의 팔 안에 그녀가 있다는 사실만이 유일한 진실이었다.
하지만 행복의 정점에서 지훈은 아주 미세한 위질감을 다시 느꼈다. 그녀의 품에 안겨 있을 때, 그는 문득 그녀의 심장 박동 소리가 지나치게 일정하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의 심장은 감정에 따라, 혹은 호흡에 따라 미세하게 속도가 변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녀의 가슴에서 울리는 소리는 마치 정교하게 설계된 메트로놈처럼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정한 간격으로 뛰고 있었다. 지훈은 살며시 그녀의 품에서 떨어져 그녀의 눈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답게 웃고 있었지만, 그 미소는 조금 전보다 더 고정된 것처럼 보였다.
그는 문득 깨달았다. 그녀가 재현하고 있는 모든 행동과 말투가 너무나 '완벽'하다는 것을. 아내는 때로는 짜증을 냈고, 때로는 엉뚱한 실수를 했으며, 때로는 말다툼 끝에 서운함을 내비치던 입체적인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여자는 지훈이 기억하는 아내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 즉 그가 그리워하는 '최적의 상태'만을 골라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은 기억의 재구성이 만들어낸 정교한 환영 같기도 했고, 누군가 의도적으로 빚어낸 모조품 같기도 했다. 기쁨과 안도감 사이로 서늘한 의구심이 스며들었다. 지훈은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 평화가 언제 깨질지 모른다는 막연한 공포가 싹트기 시작했다.
거실의 조명은 평소와 다름없이 은은한 주황빛을 띠고 있었고, 공기 중에는 아내가 생전에 즐겨 쓰던 은은한 라벤더 향이 감돌았다. 지훈은 소파에 앉아 찻잔을 든 그녀의 옆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지훈에게 따뜻한 차 한 잔을 권했다. 그 모든 몸짓과 표정, 목소리의 톤까지도 완벽했다. 하지만 그 완벽함이 오히려 지훈의 신경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그는 문득 그녀가 찻잔을 내려놓는 방식이 지나치게 정교하다는 생각을 했다. 예전의 아내는 찻잔을 내려놓을 때 가끔 '달그락' 소리를 냈고, 서두르다 보면 찻받침의 위치가 살짝 어긋나곤 했다. 그것은 지훈이 사랑했던 그녀만의 작은 빈틈이었으며, 인간적인 서투름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마치 정밀하게 계산된 기계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찻잔을 제자리에 놓았다.
"왜 그렇게 쳐다봐? 내 얼굴에 뭐 묻었어?"
그녀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그 각도, 눈꼬리의 휘어짐까지도 기억 속의 아내와 정확히 일치했다. 하지만 지훈은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그는 시험하듯 아주 사소한 질문을 던졌다.
"우리 예전에 제주도 갔을 때, 기억나? 그 비 오던 날에 들렀던 작은 카페 말이야."
그녀는 잠시 멈칫하는 듯하더니, 곧바로 화사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기억나지. 창밖으로 비 내리는 걸 보면서 같이 책 읽었던 곳이잖아. 정말 좋았는데."
지훈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카페는 비가 내렸지만, 그들은 책을 읽지 않았다. 오히려 갑작스러운 폭우에 갇혀 서로의 발등에 떨어진 빗방울을 보며 깔깔거리며 웃다가, 나중에는 젖은 신발 때문에 투덜거렸던 기억이 훨씬 강렬했다. 그녀의 대답은 틀렸지만, 동시에 너무나 '그럴듯한' 정답이었다. 마치 누군가 아내의 기록을 훑어본 뒤, 가장 일반적이고 아름다운 기억의 조각을 임의로 끼워 맞춘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지훈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자신의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불안감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지훈은 그녀가 잠시 주방으로 들어간 사이, 홀린 듯 집안 곳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만약 그녀가 진짜 아내가 아니라면, 이 집 어딘가에 위질감의 증거가 남아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는 먼저 침실로 향해 화장대 위에 놓인 물건들을 뒤졌다. 아내가 쓰던 립스틱, 향수, 손거울. 모든 것이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먼지 하나 쌓이지 않은 매끄러운 표면과 익숙한 배치. 지훈은 서랍을 열어 아내의 일기장과 편지들을 확인했다. 글씨체는 완벽했다. 획의 굵기와 기울기, 특유의 습관까지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완벽함이 오히려 그를 절망케 했다. 사람이 죽고 난 뒤의 집은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하지만, 동시에 서서히 낡아가는 법이다. 그런데 지금 이 방은 마치 방금 막 전시를 위해 세팅된 쇼룸처럼 지나치게 깨끗했다.
그는 거실로 돌아와 서랍장 위에 놓인 가족사진을 집어 들었다. 사진 속 아내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지금 거실에서 그를 향해 걸어오는 여자의 미소와 정확히 일치했다. 지훈은 사진 액자의 뒷면을 확인하고, 바닥의 카페트 끝자락을 들어 올렸으며, 심지어 냉장고 안의 식재료 유통기한까지 확인했다. 모든 것이 정상이었다. 아니, 정상보다 더 정상이었다. 마치 누군가 지훈이 무엇을 확인하려 할지 미리 알고, 그가 기대하는 '완벽한 일상'의 표본을 미리 준비해 둔 것만 같았다. 그녀가 거실로 돌아와 지훈의 어깨에 손을 얹었을 때, 지훈은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손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온기는 따뜻했지만, 그 온도가 너무 일정했다. 사람의 체온처럼 미세하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설정 온도가 고정된 히터처럼 일정한 열기였다.
지훈은 이제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그녀가 다정하게 말을 걸 때마다, 그 목소리가 고막을 울리는 것이 아니라 뇌 속에 직접 입력되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그는 그녀가 정말로 아내인지, 아니면 아내의 형태를 빌린 정체 모를 '무언가'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가장 무서운 점은, 만약 그녀가 가짜라면 이 집 전체가 거대한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14층이라는 존재하지 않는 공간에서 그녀를 데려온 순간, 자신이 돌아온 곳이 정말 자신의 집이 맞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구심이 생겼다. 벽지의 무늬, 가구의 배치, 창밖으로 보이는 거리의 풍경까지 모든 것이 평소와 같았지만, 그 모든 익숙함이 이제는 정교하게 설계된 무대 장치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지훈 씨, 어디 아파? 안색이 너무 안 좋아."
그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와 그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 순간, 지훈은 그녀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아무런 감정도 읽어낼 수 없음을 깨달았다. 눈동자는 빛을 반사하고 있었지만, 그 너머에는 영혼이라고 부를 만한 심연이 없었다. 그것은 거울처럼 지훈의 불안한 얼굴만을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지훈은 천천히 뒤로 물러나며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 박동이 빨라질수록, 상대적으로 너무나 고요하고 일정한 그녀의 존재감이 거대한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그는 이제 이 안락한 집이 세상에서 가장 낯설고 공포스러운 장소로 변해버렸음을 느꼈다. 그는 도망치고 싶었지만, 현관문 너머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지훈은 극심한 불안 속에서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미소가 이제는 포식자의 그것처럼 기괴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지훈은 도망치듯 욕실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거친 숨소리가 좁은 공간을 가득 채웠고, 차가운 타일 벽에 등을 기대자 소름 끼치는 냉기가 옷감을 뚫고 전해졌다. 그는 세면대 위에 놓인 칫솔과 컵, 그리고 가지런히 정리된 수건들을 보며 다시금 위질감을 느꼈다. 모든 것이 지나치게 정돈되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 전시해 놓은 표본처럼, 이곳에는 삶의 흔적보다는 '삶의 형태'만이 남아 있었다. 지훈은 떨리는 손으로 수도꼭지를 틀어 찬물을 얼굴에 끼얹었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아내가 가짜라는 증거를 찾아야 했고, 이 기괴한 평온함의 정체를 밝혀내야만 했다.
그는 젖은 얼굴을 닦지 않은 채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정면의 거울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평소와 다름없는 자신의 얼굴이었다. 며칠 밤을 설친 탓에 퀭한 눈과 창백한 피부, 그리고 입술 끝에 매달린 불안함까지. 하지만 거울 속의 상(像)을 응시하던 지훈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거울 속의 남자가 아주 미세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자신과 다른 박자로 움직이고 있었다. 지훈이 눈을 깜빡였을 때, 거울 속의 그는 아주 찰나의 순간 동안 눈을 뜨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착각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명확한 불일치였다. 그는 홀린 듯 거울 속의 자신에게 얼굴을 가까이 밀착시켰다. 피부의 모공과 핏줄 하나하나가 보일 만큼 가까워졌지만, 그곳에 비친 것은 더 이상 그가 알던 자신의 모습이 아니었다.
공포는 서서히 확신으로 변했다. 거울 속의 피부가 마치 젖은 종이처럼 흐물거리며 조금씩 밀려나기 시작했다. 지훈은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뺨을 만져보았다. 손끝에 닿는 감촉이 낯설었다. 그것은 사람의 살결이라기보다 정교하게 빚어진 실리콘이나 차가운 밀랍에 가까웠다. 거울 속의 형상은 이제 기괴하게 일그러지며 원래의 형태를 잃어가고 있었다. 눈코입의 위치가 미묘하게 어긋나고, 눈동자의 색이 탁하게 변해갔다.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의심하고 조사했던 대상은 아내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기억의 파편들이 날카로운 칼날처럼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14층의 그 정적,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을 때 느꼈던 그 압도적인 공허함, 그리고 그곳에서 마주했던 낯선 온기.
사실 14층에서 돌아온 것은 아내가 아니었다. 그곳에서 누군가의 손을 잡고, 누군가의 기억을 입고 다시 현실의 문을 넘어온 것은 지훈 자신이었다. 진짜 지훈은 이미 오래전 사고로 세상을 떠났거나, 혹은 그 기괴한 층의 어딘가에 영원히 유폐되었다. 지금 거울 앞에서 떨고 있는 이 존재는 죽은 지훈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만들어진 정교한 '대체제'에 불과했다. 그는 자신이 진짜라고 믿었기에 아내의 완벽함을 의심했지만, 사실 그 완벽함은 그가 가짜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거울과 같았다. 진짜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무질서와 불완전함이 그에게는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욕실 문 너머에서 가벼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지훈은 굳어버린 몸으로 문쪽을 바라보았다. 문틈 사이로 아내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그는 이제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왜 그토록 완벽하게 굴었는지, 왜 자신의 모든 행동을 관찰하듯 지켜보았는지. 그녀는 가짜가 아니었다. 그녀는 이 집의 유일한 생존자이자, 죽은 남편을 대신해 들어온 이 기괴한 모조품을 지켜보는 관찰자였다. 지훈이 떨리는 손으로 문고리를 잡고 천천히 문을 열었을 때, 아내는 복도에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이전의 다정한 미소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것은 사랑하는 남편을 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잘 만들어진 장난감이 오작동하는 것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수집가의 시선, 혹은 자신의 정체를 깨달은 하등한 존재를 가엽게 여기는 포식자의 시선이었다. 그녀의 입꼬리가 천천히, 아주 기괴할 정도로 높게 말려 올라갔다. 그것은 인간의 근육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각도였다.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이제야 알았네?" 지훈은 그 말과 함께 자신의 존재가 서서히 바스러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는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었다. 이곳은 집이 아니라, 대체제들이 머무는 정교한 상자였고, 그는 그저 그 안에 갇힌 가짜에 불과했다. 지훈은 멍하니 자신을 내려다보는 진짜 아내의 섬뜩한 미소를 마주하며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