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 내부는 기괴할 정도로 정적이 흘렀다. 그 무거운 침묵을 찢고 나온 것은 강태준의 날 선 목소리였다. 그는 벨벳 소재의 낡은 좌석에 몸을 깊숙이 묻은 채, 맞은편의 차이안을 꿰뚫어 볼 듯이 노려보았다. 창밖으로는 칠흑 같은 어둠만이 파도처럼 흐르고 있었고, 간헐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정체 모를 형체들이 유리창에 기분 나쁜 잔상을 남겼다. 태준은 손가락으로 무릎을 규칙적으로 톡, 톡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면 이상하단 말이지. 가문의 기록 어디에도 너 같은 아이가 있었다는 말은 없었어. 갑자기 나타나 후계자 행세를 하며 권력을 휘두른 게 벌써 몇 년인가?"
그의 옆에 앉은 서은하가 콧방귀를 뀌며 거들었다. 그녀는 손가락에 낀 화려한 보석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차이안의 얼굴을 느릿하게 훑었다.
"태준 씨 말이 맞아요. 이안 씨, 당신이 가진 그 증명서들이 정말 진짜라고 믿으세요? 사실은 누군가의 것을 훔쳤거나, 아주 정교하게 위조된 종이 쪼가리일 가능성이 크죠. 진짜 혈통이라면 굳이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정체성을 증명하려 애쓸 필요가 없을 텐데 말이에요."
은하의 눈빛에는 단순한 의구심을 넘어 상대를 짓밟고 올라서려는 노골적인 탐욕이 서려 있었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차이안을 포위하듯 압박해 들어왔다. 이안은 등 뒤로 식은땀이 한 줄기 흐르는 것을 느꼈지만, 표정만은 무심하게 유지했다. 그녀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찻잔의 테두리를 천천히 매만지며 입술을 뗐다.
"기록이라는 건 쓰는 사람의 입맛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법이죠. 두 분이야말로 가문의 권리를 되찾겠다는 명분 아래, 얼마나 많은 이들의 권리를 짓밟고 여기까지 오셨는지 잊으신 건 아니겠죠?"
이안은 일부러 모호한 화법을 사용해 그들의 불안감을 자극했다. 정체가 탄로 나는 것보다, 두 사람이 서로를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 최선의 방어였다. 태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는 이안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서은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권리? 은하 씨, 당신이 주장하는 그 '정당한 지분'이라는 게 사실은 숙부님의 유언장을 조작해서 얻어낸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더군. 종착역에서 새로운 인장을 받아 그 조작을 덮으려는 것 아닌가?"
태준의 공격은 예상보다 날카로웠고, 은하의 얼굴에서 여유로운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뭐라고요? 근거 없는 헛소리를 지껄이지 마세요! 조작한 건 오히려 당신 쪽이겠죠. 가문의 재산을 빼돌려 도박 빚을 청산했다는 이야기가 거짓말은 아닐 테니까요."
은하가 날카롭게 쏘아붙이며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순식간에 팽팽해졌다. 서로의 약점을 짚어내며 헐뜯는 모습은 흡사 굶주린 짐승들이 먹잇감을 두고 다투는 형국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차이안에게 집중하지 않았다. 대신 누가 더 '순수한' 혈통이며 자격이 있는지를 두고 진흙탕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안은 이 상황을 조용히 관찰하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띄웠다. 갈등이 깊어질수록 자신의 가짜 신분에 대한 의구심은 뒤로 밀려났다. 그녀는 적절한 타이밍에 한마디를 얹었다.
"결국 종착역에 도착하면 모든 게 밝혀지겠죠. 누가 진짜 가문의 주인인지, 그리고 누가 가장 추악한 거짓말을 해왔는지 말이에요."
그 말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태준과 은하는 서로를 향해 더욱 격렬한 비난을 쏟아냈고, 열차 칸 내부에는 고함과 냉소가 가득 찼다. 하지만 승리감에 젖어있던 이안의 감각은 곧 다른 곳으로 향했다. 소란스러운 대화 너머로, 열차의 분위기가 기이하게 변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기분 탓이라 생각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았고 피부에 닿는 바람은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천장에 매달린 낡은 전등이 불규칙하게 깜빡거릴 때마다 주변의 풍경이 찰나의 순간 일그러졌다. 마치 공간 자체가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는 느낌이었다.
벽면을 감싼 갈색 가죽 시트가 서서히 눅눅해지기 시작했다. 이안이 팔을 기대고 있던 곳에서 정체 모를 습기가 배어 나와 옷감을 적셨고, 이내 코끝을 찌르는 곰팡이 냄새와 비릿한 혈향이 공기 중에 은은하게 섞여 들었다. 단순한 한기라고 치부하기에는 지나치게 집요한 냉기가 뼛속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다. 이안은 소름 돋은 팔뚝을 무의식적으로 문질렀다.
그녀의 시선 끝에서 태준과 은하는 여전히 서로의 멱살을 잡을 기세로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들의 모습이 기괴하게 비치기 시작했다.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 충혈된 눈동자 위로 마치 잉크를 쏟은 듯한 검은 그림자가 덧씌워진 환각이 스쳤다. 그들의 외침은 더 이상 인간의 언어라기보다 굶주린 짐승의 포효처럼 들렸다.
열차의 진동이 점차 강해졌다. 그것은 기계적인 덜컹거림이 아니었다. 거대한 심장이 육중한 박동을 내뿜는 듯한 고동 소리가 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소음의 틈새를 비집고 정체불명의 속삭임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수십, 수백 명의 망자가 한꺼번에 울부짖는 듯한 그 소리는 이안의 귓가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뇌수를 흔들었다. 이안은 전율했다. 이 열차는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었다. 탑승객들의 증오와 탐욕을 자양분 삼아 자라나는, 거대한 무덤이자 살아있는 괴물이었다.
압도적인 공포가 전신을 휘감았다. 가짜 후계자로서 타인의 삶을 훔치고 거짓을 진실로 둔갑시키는 법을 익혀온 그녀였지만, 이 공간이 뿜어내는 원초적인 위압감 앞에서는 그 어떤 교묘한 술수도 무용지물처럼 느껴졌다. 태준과 은하의 고함은 이제 거대한 소음의 일부가 되어 웅웅거렸고, 그들의 다툼은 정해진 각본대로 움직이는 공허한 연극처럼 보였다.
이안은 가빠오는 숨을 몰아쉬며 좌석 손잡이를 꽉 쥐었다. 그 순간, 손끝에 닿은 차가운 금속의 질감이 마치 얼음처럼 차갑게 식어버린 죽은 자의 손가락처럼 느껴져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 손을 뗐다. 창밖의 어둠은 이제 단순한 밤이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는 거대한 아가리처럼 열차를 에워싸고 있었다.
'내가 판 함정에 내가 갇힌 건가.'
두 사람의 갈등을 부추겨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 했지만, 정작 이 기괴한 공간이 요구하는 '제물'의 조건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시간만 허비했다는 깨달음이 밀려왔다. 열차가 속도를 높일수록, 그리고 '망자의 안식처'라는 종착역이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심장은 불안하게 요동쳤다.
"여기서 나가야 해..."
이안이 작게 중얼거렸으나, 그녀의 가냘픈 목소리는 열차의 굉음에 묻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태준과 은하는 여전히 가문의 권리를 주장하며 서로를 헐뜯고 있었지만, 그들의 눈은 이미 초점을 잃은 채 광기에 젖어 있었다. 이안은 그들의 모습에서 자신의 미래를 보았다. 욕망에 눈이 멀어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조차 잊어버린 가련한 영혼들. 그녀는 떨리는 숨을 몰아쉬며 몸을 웅크렸다.
강태준과 서은하의 고함이 객실 벽을 타고 기괴하게 공명했다. 그들은 서로의 과거를 끄집어내 난도질하며 정통성을 주장했지만, 그 소리는 이미 짐승의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이안은 그 소란에서 한 발짝 물러나 숨을 죽였다. 가짜 신분이라는 위태로운 외줄 타기를 하는 그녀에게 두 사람의 싸움은 일시적인 방패막이였으나, 내부의 공기는 점점 더 무겁고 습해졌다.
벽면의 가죽 시트는 이제 살아있는 생물의 피부처럼 꿈틀거렸고, 천장에서는 정체 모를 끈적한 점액질이 바닥으로 툭, 툭 떨어지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포식자의 내장 속으로 걸어 들어온 것 같다는 생각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을 때, 소란스러운 소음을 뚫고 정적의 파편 같은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때렸다.
"정말 가련한 광경이군요."
이안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언제 나타났는지, 열차의 안내자인 집사가 바로 뒤에 서 있었다. 그는 평소처럼 흐트러짐 없는 연미복 차림이었지만, 발밑으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생물처럼 꿈틀거리며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었다. 기이한 것은 강태준과 서은하였다. 그들은 서로의 멱살을 잡고 얼굴을 붉히며 고함을 지르고 있었지만, 바로 옆에 집사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다.
집사는 오직 이안만을 응시하며 입꼬리를 기괴하게 끌어올렸다.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깊고 어두운 심연 같은 눈동자가 그녀의 영혼을 꿰뚫는 듯했다. 그가 이안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였다. 오직 그녀에게만 들리는, 서늘한 냉기를 머금은 낮은 속삭임이 시작되었다.
"이 열차는 목적지로 향하는 단순한 운송 수단이 아닙니다. 이것은 거대한 포식자이자, 죄악을 먹고 자라는 괴물이지요."
이안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집사는 무심한 표정으로 여전히 아귀다툼을 벌이는 두 사람을 가리켰다. 그는 이 열차가 종착역에 닿기 전, 반드시 가장 추악한 영혼 하나를 제물로 삼아야만 문을 열어준다고 설명했다. '가장 죄가 깊은 자'라는 기준은 법적인 범죄가 아니었다. 영혼에 각인된 배신과 살의, 그리고 씻을 수 없는 죄책감의 무게가 결정짓는 잔혹한 저울이었다.
이안은 순간 심장이 멎는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가문의 이름을 훔치고 타인의 삶을 찬탈해 온 그녀 역시 충분히 '깊은 죄'를 가진 자였다. 만약 이 괴물이 그녀의 가짜 신분을 꿰뚫어 본다면, 제단 위에 오를 제물은 바로 자신이 될 터였다.
"지금 저들은 서로의 치부를 드러내며 스스로를 제물로 추천하고 있습니다만, 아직은 부족합니다. 죄의 농도가 너무 옅군요."
집사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이안의 어깨를 가볍게 짚었다. 옷감을 뚫고 스며든 소름 끼치는 냉기에 그녀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집사는 그녀의 공포를 즐기듯 더 은밀하게 제안했다. 단순히 운에 기대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생존할 방법을 알려주겠다는 유혹이었다. 이안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 안내자가 진실을 알려준 이유는 친절함이 아니라, 그녀의 냉혹한 생존 본능을 이용해 더 거대한 제물을 빚어내기 위함이라는 것을.
"살아남고 싶으시다면, 저들의 기억을 자극하십시오. 외면하고 숨겨온 가장 어두운 기억, 그 살인과 배신의 조각들을 다시 끄집어내어 증폭시키는 겁니다. 죄책감이 공포로 변하고, 그 공포가 확신이 되는 순간, 저들 중 하나는 '완벽한 제물'이 되겠지요."
잔인한 종용이었다. 단순히 사실을 폭로하는 수준을 넘어, 상대가 스스로의 죄에 짓눌려 무너지게 만드는 심리적 고문을 수행하라는 명령이었다. 이안은 잠시 망설였지만, 곧 옆에서 들려오는 태준의 저주 섞인 욕설과 은하의 날카로운 비명에 정신을 차렸다. 저들은 이미 서로를 증오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불을 지피면 누군가는 반드시 벼랑 끝으로 밀려날 것이다. 그리고 그 희생양의 무게가 무거울수록, 그녀가 얻게 될 가짜 권력의 자리는 더욱 공고해질 터였다.
이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빛에서 불안함이 걷히고, 먹잇감을 노리는 포식자의 서늘함이 자리 잡았다. 집사는 만족스러운 듯 낮게 웃으며 다시 어둠 속으로 스며들 듯 사라졌다. 태준과 은하의 싸움은 더욱 격렬해졌고, 열차의 진동은 마치 굶주린 짐승이 가르릉거리는 소리처럼 변해 있었다. 이안은 이제 떨지 않았다. 그녀는 두 사람의 갈등 사이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이제 그녀가 해야 할 일은 단순했다. 그들의 기억 속에 잠든 괴물을 깨워, 이 열차의 허기를 채울 가장 완벽한 제물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이안은 태준과 은하 사이의 팽팽한 정적을 가르고 들어갔다.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삿대질하며 가문의 적통과 정당성을 부르짖고 있었으나, 이안의 눈에 그들은 그저 굶주린 짐승들의 아귀다툼에 불과했다. 그녀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띄우며 은하의 곁으로 다가갔다. 나직하고 부드러운 음성이었지만, 그 끝은 서늘한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정말 그렇게 믿으세요, 은하 씨? 당신이 그토록 갈망하는 그 자리가, 당신이 지워버린 누군가의 피 위에 세워졌다는 걸 잊으신 건 아니겠죠.”
은하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의 얼굴을 뒤로한 채, 이안은 곧장 태준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태준 씨도 마찬가지예요. 당신이 말하는 ‘가문의 영광’이라는 게, 사실은 당신의 손으로 밀어낸 형제들의 절망을 발판 삼아 얻어낸 가짜 껍데기라는 걸 여기서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태준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이안은 집사가 일러준 대로 그들의 기억 속에 숨겨진 추악한 진실의 파편들을 끄집어내어 증폭시켰다. 배신의 순간들을 구체적인 단어로 묘사하며 위선의 가면을 하나씩 벗겨내자, 열차의 진동이 더욱 거세졌다. 마치 죄책감의 농도가 짙어질수록 굶주린 괴물이 흥분하는 것 같았다. 이안은 이 상황을 즐기며 그들을 사지로 밀어 넣기 위한 심리적 덫을 촘촘히 짰다.
“지금 우리가 여기서 서로를 탓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죠? 결국 종착역에 도착하는 단 한 사람만이 모든 것을 갖게 될 텐데.”
이안은 일부러 두 사람이 서로를 더 의심하게 만들었다. 상대가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그리고 먼저 상대를 제거하지 않으면 자신이 제물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존 본능을 자극했다. 태준은 이를 갈며 은하를 노려보았고, 은하는 떨리는 손으로 옷자락을 꽉 쥐었다. 이안은 중재자인 양 행동하며 그들의 목을 죄는 올가미를 천천히 당겼다.
하지만 그녀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태준과 은하는 단순히 욕망에 눈먼 바보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평생을 서로를 속이고 밟으며 살아온 가문의 생존자들이었다. 이안이 주도권을 잡았다고 확신한 순간, 두 사람의 눈빛에는 의구심과 서늘한 계산이 스치기 시작했다. 태준은 이안의 능숙한 말솜씨와 태도에서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것은 타인의 고통을 관찰하며 쾌락을 느끼는 포식자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은하 역시 이안의 정교한 논리가 역설적으로 그녀가 얻고자 하는 이득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음을 깨달았다.
두 사람은 찰나의 시선을 교환했다. 그것은 동맹이라기보다 더 큰 적을 처리하기 위해 잠시 손을 잡는 짐승들의 무언의 합의였다. 가문의 진짜 혈통이라면 결코 가질 수 없는 비열한 영악함이야말로 그녀가 침입자라는 가장 강력한 증거였다. 이제 판세는 뒤집혔다. 태준이 낮은 목소리로 은하에게 속삭였다.
“저 여자가 우리를 밀어 넣으려 한다면, 우리는 더 깊은 구덩이를 파서 저 여자를 떨어뜨리면 되겠군.”
태준이 갑자기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이안에게 다가왔다. 방금까지 서슬 퍼런 적개심을 드러내던 태도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마치 오래된 지인을 대하듯 친근한 어조로 말을 걸었지만, 가늘게 뜬 눈 속에는 얼음장 같은 냉기가 서려 있었다.
“맞아요, 이안 씨 말이 정확합니다. 우리 셋 다 추악하죠. 하지만 여기서 진짜 생각해야 할 문제는 우리의 죄질이 아니라, 우리 사이에 교묘하게 숨어든 ‘가짜’가 누구냐는 것 아닐까요?”
이안의 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예상치 못한 태도 변화에 그녀가 반응하기도 전, 은하가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틈을 파고들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자신의 턱을 가볍게 만지며 나긋나긋하게 덧붙였다.
“맞아요. 이 열차가 정말로 죄인을 원한다면, 단순히 욕심을 부린 것보다 더 큰 죄는 가문의 이름을 훔쳐 이곳까지 기어 들어온 자의 것이겠지요. 타인의 삶을 찬탈한 기만이야말로 가장 지독한 죄악이니까요.”
이안은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그녀가 설계한 심리적 덫이 오히려 그녀의 정체를 드러내는 이정표가 되어버린 셈이었다. 평정심을 되찾으려 애쓰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지만, 태준과 은하의 협공은 치밀했다. 그들은 이제 이안을 공격하는 대신, 그녀가 스스로 함정으로 걸어 들어오게끔 유도하기 시작했다.
“이안 씨, 저 앞쪽 칸에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특별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곳에 가면 우리가 서로의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가 있을지도 모르죠. 정말 당당하시다면 함께 가보시겠습니까?”
태준의 제안은 명백한 유인책이었다. 하지만 거절하는 순간 자신의 정체불명함만 더욱 부각될 터였다. 이안은 그들의 압박에 밀려, 혹은 자신의 오만함 때문에 그들이 설계한 경로를 따라 열차의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서로를 혐오하던 두 사람이 오직 '침입자'를 제거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결탁한 기괴한 연대는 이안의 목을 서서히 죄어왔다. 자신이 쳐놓은 그물 속에 스스로 갇히고 있다는 공포가 엄습했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진 상태였다.
마침내 도착한 열차의 마지막 칸. 그곳에는 무거운 정적이 흐르는 거대한 제단이 놓여 있었다. 공기는 습하고 비릿했으며, 정체 모를 압박감이 피부를 짓눌렀다. 태준과 은하는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움직였다. 그들은 이안의 양팔을 붙잡아 제단 쪽으로 거칠게 밀어붙였다. 둔탁한 충격과 함께 이안의 등이 차가운 석재 제단에 닿았다.
“가짜 주제에 어디까지 올라가려 했지? 네 정체는 이미 다 들통났어.”
태준의 냉소적인 목소리가 텅 빈 칸 안에 울려 퍼졌다. 은하는 승리감에 도취한 눈빛으로 이안을 내려다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여기서 제물이 되어 사라지는 게 네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가문의 봉사야.”
하지만 제단 끝에 몰린 이안의 입가에는 뜻밖에도 기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녀는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르는 대신, 허공의 어느 한 지점을 응시하며 낮고 서늘하게 읊조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진짜와 가짜를 가르는 기준이 고작 혈통뿐이라면, 이 열차는 너무 단순하죠.”
이안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찰나의 정적 뒤, 제단 주변의 공기가 기름진 물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안내자와 맺은 은밀한 거래의 신호였다. 갑자기 바닥에서 솟구친 검은 안개가 태준과 은하의 발치를 휘감더니, 이내 그들의 기억 속에 박제된 가장 끔찍한 순간을 환영으로 빚어냈다.
“이, 이게 왜 여기에……!”
은하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허공에 선명하게 떠오른 것은 피 칠갑이 된 거실과 그 중심에서 공포에 질린 눈으로 자신들을 바라보던 진짜 상속자의 얼굴이었다. 태준의 손에는 날카로운 흉기가 들려 있었고, 은하는 그 곁에서 냉소적인 미소로 죽음을 방조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공모해 가문의 적통을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했던 그날의 참혹한 광경이 고해성사처럼 적나라하게 펼쳐졌다.
열차의 괴물은 신분증 같은 종이 쪼가리가 아니라, 영혼에 깊게 각인된 죄악의 냄새에 반응했다. 증폭된 살인의 기억이 뿜어내는 지독한 악취에 굶주린 괴물이 반응했다. 열차 전체가 거대한 포식자의 포효처럼 거칠게 진동하며 비명을 질렀다.
바닥에서 솟아오른 검은 그림자들이 족쇄처럼 태준과 은하의 발목을 낚아챘다.
“이거 놔! 이안, 네가 무슨 짓을 한 거야!”
태준이 발버둥 쳤지만, 그림자는 이미 그의 살점을 파고들어 뼈마디까지 옥죄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밀치며 도망치려 했으나, 그것은 오히려 괴물의 아가리를 향해 스스로를 밀어 넣는 꼴이었다. 영혼이 갈기갈기 찢겨 나가는 고통에 찬 절규가 칸 내부를 메웠다.
이안은 그 아수라장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곁에 나타난 안내자에게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마지막 계약을 요구했다.
“저들의 참회와 고통을 전부 제물로 바치겠어요. 그 대가로 나의 가짜 신분을, 이 가문의 유일하고 진정한 ‘진짜’로 인정받겠습니다.”
안내자의 서늘한 동의와 함께 태준과 은하의 형체는 검은 소용돌이 속으로 완전히 소멸했다. 그들이 남긴 생명의 정수와 가문의 권위가 보이지 않는 흐름이 되어 이안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마침내 열차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멈춰 섰고, 육중한 문이 열리며 종착역의 눈부신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홀로 살아남아 플랫폼에 내린 이안의 손에는 가문의 모든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인장과 서류들이 쥐어져 있었다. 이제 누구도 그녀의 자격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마침내 갈구하던 절대적인 위치에 올랐다.
하지만 역 대합실의 커다란 거울 앞에 선 순간, 이안은 등 뒤에서 서늘한 한기를 느꼈다. 거울 속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자신의 모습 뒤로, 그림자처럼 끈질기게 달라붙은 형체들이 보였다. 집어삼켜진 태준과 은하, 그리고 그들이 죽였던 상속자의 원혼들이었다.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지만, 이안의 귓가에는 끊임없는 곡소리가 환청처럼 울려 퍼졌다. 막대한 권력이 기다리는 삶이었지만, 그것은 죽은 자들의 비명과 함께해야 하는 화려한 지옥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