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안은 책상 위에 놓인 무선 마우스와 키보드의 각도를 자로 잰 듯이 맞춘 뒤에야 비로소 노트북 전원을 켰다. 새로 이사 온 이 아파트는 그가 원했던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최신식 방음 설비가 완비된 벽체, 먼지 하나 없이 매끄럽게 마감된 바닥, 그리고 무엇보다 주변의 소음이 완벽하게 차단된 정적. 프리랜서 번역가인 그에게 정적은 단순한 환경이 아니라 작업 효율을 결정짓는 필수적인 도구였다. 그는 손가락 끝에 닿는 키보드의 촉감을 느끼며 외국의 철학 서적을 한국어로 옮기기 시작했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여백을 메우는 것은 오직 그의 규칙적인 호흡뿐이었고, 그는 이 고립된 평화 속에서 비로소 안도감을 느꼈다. 그는 결벽증에 가까운 성격 탓에 집안의 모든 물건이 지정된 위치에 있어야만 마음이 편안했다. 책상 위 컵의 위치가 1센티미터만 틀어져도 그는 집중력을 잃고 그것을 바로잡아야만 했다.
하지만 이 완벽한 고요함은 밤이 깊어지면서 조금씩 균열을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건물 외벽을 타고 흐르는 바람 소리거나, 배관을 타고 흐르는 물소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소리는 특정한 패턴을 띠기 시작했다. 시계 바늘이 정확히 밤 11시를 가리킬 때쯤, 지안의 신경을 자극하는 이질적인 소음이 벽 너머에서 들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아주 미세했지만, 예민한 지안의 귀에는 천둥소리만큼이나 명확하게 박혔다. 무언가 딱딱한 것이 벽지를 긁어내리는 듯한 소리였다. 서걱, 서걱. 규칙적인 간격을 두고 반복되는 그 소리는 마치 누군가 손톱이나 날카로운 도구로 벽면을 천천히 긁어내리는 것처럼 들렸다. 지안은 미간을 찌푸리며 헤드셋을 썼지만, 소리는 진동이 되어 그의 고막을 직접 타격했다.
다음 날 밤에도 소음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정확히 11시였다. 지안은 이번에는 미리 준비라도 한 듯, 시계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소리를 기다렸다. 10시 59분 58초, 59초, 그리고 11시. 기다렸다는 듯이 벽 너머에서 '슥, 스윽' 하는 긁는 소리가 시작되었다. 지안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의자에서 일어나 벽 쪽으로 다가갔다. 그는 숨을 죽인 채 귀를 벽면에 바짝 밀착시켰다. 벽지는 차갑고 매끄러웠지만, 그 너머에서 전해지는 진동은 기괴할 정도로 생생했다. 단순히 가구를 옮기거나 벽에 무언가를 거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매우 의도적이고 정교한 움직임이었다. 마치 벽 너머의 누군가가 이 벽의 정확한 지점을 찾아서 천천히 선을 긋고 있는 것만 같았다. 지안은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가 귀에 들릴 정도로 긴장했다. 그는 옆집에 누가 사는지 알지 못했다.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복도에서 마주친 적도 없었다. 하지만 이 소음만큼은 그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소음은 긁는 행위에서 멈추지 않았다. 긁는 소리가 잠시 멈춘 틈을 타, 아주 낮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그것은 말소리라기보다는 짐승의 신음이나 바람이 새어 나오는 소리에 가까웠다. 하지만 지안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것은 분명히 누군가가 내뱉는 언어였다. 단어의 형태는 분명했지만, 의미는 파악되지 않는 기괴한 억양의 속삭임이었다. "...여기, 여기..."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했고, 무언가를 애타게 부르는 소리 같기도 했다. 지안은 반사적으로 벽에서 떨어지며 뒤로 물러났다. 정적만이 가득해야 할 자신의 성소가 정체 모를 소음으로 침범당했다는 사실에 그는 극심한 불쾌감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날 이후로 지안의 일상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낮 시간의 번역 작업 중에도 그는 밤 11시가 되면 들려올 그 소리를 기다리며 강박적으로 시계를 확인했다. 그는 소음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벽의 어느 지점에서 소리가 가장 크게 들리는지 세밀하게 측정하기 시작했다. 거실 벽, 침실 벽, 그리고 주방과 이어진 작은 벽까지. 그는 마치 탐정이라도 된 것처럼 벽면을 따라 이동하며 귀를 기울였다. 소리는 항상 일정한 지점에서 발생했다. 거실과 침실 사이의 좁은 복도 벽, 바로 그곳이었다. 그는 그 지점에 귀를 대고 숨을 멈췄다. 다시 시작된 긁는 소리는 이전보다 조금 더 깊고 날카로워져 있었다. 서걱, 서걱, 스윽. 소리는 마치 벽지 속의 콘크리트를 파내려는 것처럼 집요했다.
지안은 소름 끼치는 상상에 휩싸였다. 옆집 사람이 벽 속에 무언가를 숨겨두었거나, 혹은 벽 너머에서 누군가 자신을 관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는 결벽증적인 성격 탓에 주변 환경이 자신의 통제 하에 있지 않다는 사실에 극도의 불안을 느꼈다. 그는 메모장에 소음이 시작된 시간과 지속 시간, 그리고 소리의 빈도를 기록했다. 매일 밤 11시 정각 시작, 약 15분간 지속. 규칙성은 소름 돋을 정도로 완벽했다. 자연적인 소음이라면 이렇게 정확한 시간에 시작하고 끝날 리가 없었다. 이것은 명백히 의도적인 행위였다. 누군가 계획적으로 벽을 긁고, 누군가에게 들리게끔 속삭이고 있었다. 지안은 이제 그 소리가 단순한 소음이 아니라 자신에게 보내는 어떤 신호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불안은 점차 신경질적인 분노로 변했다. 지안은 밤마다 찾아오는 그 소음 때문에 제대로 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잠결에 들리는 희미한 속삭임은 그의 꿈속까지 파고들어 기괴한 형상으로 변모했다. 그는 이제 벽에 귀를 기울이는 행위 자체에 집착하게 되었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10시 50분부터 그는 이미 벽 앞에 서서 대기했다. 그는 벽 너머의 존재가 무엇인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알아내야만 했다. 하지만 벽은 견고했고, 그 너머의 진실은 두꺼운 콘크리트 층에 가로막혀 있었다. 그는 옆집 문을 두드려 볼까 고민했지만, 낯선 이와의 접촉을 꺼리는 그의 성격이 그를 가로막았다. 대신 그는 벽에 더 바짝 다가갔다. 이제는 귀뿐만 아니라 뺨과 이마까지 벽에 밀착시킨 채, 아주 작은 숨소리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속삭임이 평소보다 더 뚜렷하게 들려왔다. "...찾았어..." 아주 짧은 한마디였다. 지안은 전신에 소름이 돋으며 몸을 떨었다. 누군가 무엇을 찾았다는 것인가. 그리고 왜 그것을 자신의 집 벽 너머에서 말하고 있는 것인가. 그는 공포와 호기심이 뒤섞인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소리는 곧바로 다시 긁는 소리로 이어졌지만, 이번에는 이전보다 훨씬 더 격렬했다. 마치 벽을 뚫고 나오려는 것처럼, 혹은 벽 속에 갇힌 무언가를 끄집어내려는 것처럼 소리는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지안은 신경질적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정적을 사랑했던 그에게 이 소음은 단순한 방해물이 아니라, 그의 정신적 영토를 침범하는 공격처럼 느껴졌다.
결국 지안은 한계에 다다랐다. 그는 더 이상 이 소음을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이제 번역 업무조차 제대로 처리하지 못할 정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텍스트의 의미보다 벽 너머의 진동이 더 크게 다가왔고,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이 더 이상 안전한 안식처가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는 거실 한복판에 서서 벽을 쏘아보았다. 깨끗하고 하얀 벽지 너머에 도대체 무엇이 숨어 있는 것일까. 매일 밤 같은 시간, 정교하게 반복되는 그 기괴한 의식의 정체는 무엇일까. 지안은 신경질적으로 책상 위의 물건들을 정리하며 호흡을 가다듬었지만,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불안감은 가라앉지 않았다.
그는 이제 옆집 여자의 정체를 알아내야겠다고 결심했다. 관리사무소를 통해 확인한 결과, 옆집에는 한 여자가 살고 있었다. 이름은 수현. 지안은 그녀가 이 모든 소음의 주범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 확신은 안도감이 아니라 더 큰 의심을 낳았다. 대체 어떤 사람이 매일 밤 벽을 긁으며 속삭이는 것일까. 지안은 벽에 귀를 대고 다시금 그 소리를 기다렸다. 시계가 11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그의 신경은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 그는 이제 소음이 들려오지 않는 순간조차 불안해하며, 벽 너머에서 들려올 그 기괴한 신호를 갈구하는 상태가 되었다. 정적을 사랑하던 번역가는 이제 정적을 두려워하며, 소음의 정체에 집착하는 신경질적인 관찰자가 되어 있었다.
지안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밤마다 반복되는 그 기괴한 긁는 소리와 알아들을 수 없는 속삭임은 그의 수면을 앗아갔고, 일상의 모든 집중력을 갉아먹었다. 그는 거실 벽에 귀를 대고 숨을 죽인 채, 시계 바늘이 11시를 가리키는 순간을 기다렸다. 소리가 시작되자마자 지안은 마치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분노와 불안이 뒤섞인 심장 박동이 귓가에 울려 퍼졌다. 그는 거칠게 현관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복도의 차가운 형광등 불빛이 그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었다. 그는 옆집 문 앞에 멈춰 섰다. 관리사무소에서 알아낸 이름, '수현'. 지안은 그 이름만으로도 이미 그녀가 어떤 종류의 괴상한 취미를 가진 사람일지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쥔 채, 망설임 없이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 하는 맑은 소리가 정적을 깼지만, 지안의 내면은 이미 폭풍우가 몰아치는 전쟁터와 같았다. 그는 문이 열리자마자 쏟아낼 항의의 말들을 머릿속으로 날카롭게 다듬으며, 그녀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문 너머에서 가벼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지안은 숨을 들이켰다. 그는 자신이 지금 매우 위협적이고 단호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상대가 누구든, 이 말도 안 되는 소음을 즉각 멈추게 하겠다는 일념뿐이었다. 마침내 도어록이 해제되는 전자음이 들리고, 육중한 현관문이 천천히 열렸다. 지안은 준비했던 말을 내뱉기 위해 입술을 뗐지만, 문틈 사이로 나타난 여자의 모습에 순간적으로 말을 잃었다. 그곳에는 그가 상상했던 '기괴한 소음의 주범'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여자가 서 있었다. 깨끗하게 정돈된 단발머리에 연한 베이지색 홈웨어를 입은 그녀는, 마치 잡지 화보에서 막 튀어나온 것처럼 단정하고 온화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여자의 눈매는 부드러웠고, 입가에는 적절한 각도의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녀는 지안이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혹은 이 상황을 충분히 예상했다는 듯 아주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옆집 분이시죠? 제가 혹시 실례를 범한 게 있을까요?" 그녀의 목소리는 맑고 청아했다. 지안은 예상치 못한 그녀의 완벽한 외양과 상냥한 태도에 당황하여 잠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 그는 자신이 이곳에 왜 왔는지를 상기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날 선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실례냐고요? 매일 밤 11시만 되면 벽 너머에서 무슨 소리를 내시는 겁니까? 긁는 소리에, 정체 모를 속삭임까지.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처음에는 집 문제인 줄 알았는데, 시간이 너무 일정하더군요. 대체 집 안에서 뭘 하시는 거죠?"
지안의 공격적인 말투에도 수현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세상에, 정말 죄송해요. 제가 소음을 냈나요? 저는 전혀 인지하지 못했어요. 혼자 지내다 보니 집안이 너무 조용해서 제 소리가 그렇게 크게 들릴 줄은 몰랐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앞으로 각별히 주의할게요." 그녀의 사과는 너무나 정중했고, 태도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지안은 그녀의 반응이 지나치게 매끄럽다는 느낌을 받았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갑작스러운 항의에 당황하거나 불쾌해하기 마련인데, 수현은 마치 잘 짜인 각본대로 움직이는 배우처럼 유연하게 대처하고 있었다. 그녀의 친절함은 오히려 지안의 의심을 자극하는 묘한 이질감을 만들어냈다.
수현은 지안의 표정이 여전히 풀리지 않은 것을 읽었는지, 더욱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 "사실 저도 이 집에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가끔 밤마다 벽 쪽에서 이상한 울림이 들릴 때가 있었어요. 혹시 이 건물 자체가 오래되어서 배관 문제나 벽 내부의 결함 때문은 아닐까요? 제가 소리를 낸 게 아니라, 건물 구조상 소음이 증폭되어 들리는 것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저도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는데, 옆집 분께서도 그러셨다니 정말 이상하네요." 그녀의 논리는 정연했고, 목소리에는 확신과 안심시키는 힘이 있었다. 지안은 순간적으로 그녀의 말에 설득될 뻔했다. '건물의 결함'이라는 가능성은 그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만약 정말로 벽 내부의 문제라면, 그가 지금까지 느꼈던 그 공포와 집착은 그저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 수현의 눈동자는 맑았고, 그 안에는 어떠한 거짓이나 숨김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럴 수도... 있겠죠." 지안이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 순간, 수현의 시선이 지안의 뒤편, 즉 그가 방금까지 귀를 대고 있었을 벽 쪽으로 아주 짧게 스쳐 지나갔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지안은 보았다. 그녀의 눈빛이 아주 잠깐, 차갑게 가라앉았다는 것을. 그것은 방금 전까지 보여주던 온화한 이웃의 눈빛이 아니었다. 마치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불청객을 관찰하는 포식자의 냉정함과 닮아 있었다. 지안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몸을 살짝 떨었다. 수현은 다시금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지안을 바라보았지만, 그 미소는 이제 지안에게 친절함이 아닌, 정교하게 설계된 가면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정말 죄송해요. 혹시라도 앞으로 또 소리가 들리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이웃끼리 얼굴 붉힐 일 없이 잘 지내고 싶거든요." 수현은 가벼운 목례와 함께 문을 닫으려 했다. 그녀의 태도는 마지막까지 완벽했다. 배려심 깊고 예의 바른 현대인의 전형이었다. 지안은 그녀가 문을 닫기 직전, 집 안쪽으로 살짝 보인 거실의 풍경을 보았다.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바닥, 각 잡혀 놓인 가구들, 그리고 무서울 정도로 정돈된 공간. 그 완벽함이 오히려 지안의 신경을 자극했다. 모든 것이 너무나 완벽해서, 오히려 그 이면에 무언가 끔찍한 것이 숨겨져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안은 그녀의 사과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의구심을 잠재울 수 없었다.
문이 닫히고 다시 복도에 정적이 찾아왔다. 지안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닫힌 문을 응시했다. 수현의 친절한 말투와 사과, 그리고 건물의 결함일 수 있다는 합리적인 설명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그녀의 말을 믿고 상황을 종료시키는 것이 맞았다. 그녀는 너무나 상식적이고 친절한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지안의 예민한 감각은 계속해서 경고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저 여자가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것일까? 저렇게 완벽하게 대처하는 사람이 정말로 실수로 소음을 냈을 리가 있을까? 지안은 자신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두려움이라기보다, 정답을 찾지 못한 수수께끼를 마주했을 때 느끼는 강박적인 갈증에 가까웠다.
지안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다시 거실 벽 앞에 섰다. 방금 전의 만남으로 인해 수현이라는 인물에 대한 정보는 얻었지만, 정작 소음의 정체에 대해서는 더 깊은 미궁 속으로 빠진 기분이었다. 그녀의 완벽한 태도는 지안에게 잠시의 혼란을 주었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집착을 더욱 공고히 만들었다. '완벽한 사람은 없다.' 지안은 그렇게 믿었다. 누구나 숨기고 싶은 구석이 있고, 누구나 말 못 할 비밀이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수현의 저 완벽함은 무엇을 가리기 위한 장치일까. 그녀가 보여준 그 친절한 미소 뒤에, 매일 밤 벽을 긁어대는 그 기괴한 손길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는 다시 시계를 보았다. 아직 11시가 되려면 시간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지안은 더 이상 이전처럼 단순히 소리를 기다리는 관찰자가 아니었다. 이제 그는 수현이라는 인물을 분석하고, 그녀의 빈틈을 찾아내려는 추적자가 되어 있었다. 그는 벽에 손을 얹고 차가운 벽지의 촉감을 느꼈다. 벽 너머에서는 이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지안은 확신했다. 수현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그리고 그 숨겨진 무언가가 매일 밤 11시가 되면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지안은 입술을 깨물며 다짐했다. 반드시 그 정체를 밝혀내겠다고. 수현의 완벽한 가면 아래에 숨겨진 추악하거나 기괴한 진실을 찾아낼 때까지, 그는 이 벽 너머의 세계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수현과 마주한 이후 지안의 신경은 날카롭게 곤두섰다. 그녀의 친절함은 마치 정교하게 설계된 기계 장치처럼 오차 없이 작동했고, 그 완벽함이 오히려 지안에게는 거대한 위선처럼 느껴졌다. 지안은 거실 한복판에 서서 시계를 보았다. 오후 3시. 평소 수현이 외출하는 시간대였다. 그는 숨을 죽인 채 현관문 밖 복도의 동태를 살폈다. 이윽고 복도 끝에서 구두 굽 소리가 들려왔고, 이내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신호음이 정적을 깼다. 수현이 나갔다. 지안은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것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다. 정답이 정해져 있는 문제를 풀기 위해 단서를 찾는 탐정의 심정과도 같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옆집 문 앞으로 다가갔다. 복도의 형광등이 미세하게 깜빡거리며 불길한 리듬을 만들어냈다. 지안은 수현의 집 문 앞에 서서 잠시 멈췄다. 문틈 사이로 배어 나오는 향기가 있었다. 은은한 라벤더 향, 혹은 그와 비슷하지만 어딘가 눅눅한 냄새가 섞인 기묘한 향취였다. 그는 손끝을 떨며 문고리를 살짝 돌려보았다. 하지만 문은 미동도 없이 굳게 닫혀 있었다. 잠금장치가 철저하게 걸려 있는 상태였다. 지안은 문에 귀를 바짝 갖다 댔다. 집 안은 죽은 듯이 고요했다. 아무런 소리도,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그 적막함이 오히려 지안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무언가가 철저히 숨겨져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복도 벽면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수현의 집과 자신의 집을 가르는 그 얇은 콘크리트 벽. 겉으로는 평범한 벽지 뒤에 무엇이 숨어 있을까. 지안은 손바닥으로 벽을 쓸어내렸다. 차가운 벽지의 질감이 손가락 끝에 닿았지만,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벽 너머의 공간이 입체적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수현의 완벽한 거실, 정돈된 가구들, 그리고 그 뒤편 어딘가에 숨겨진 어두운 구석. 그는 수현이 결코 보여주지 않았던 그 '뒷면'을 상상했다. 친절한 미소 뒤에 숨겨진 서늘한 눈빛이 그곳에 머물고 있을 것만 같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복도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지안은 한참 동안 문 앞을 서성였지만, 굳게 닫힌 문은 그에게 어떠한 틈도 허락하지 않았다. 허탈함과 초조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그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다시 벽 앞에 섰다. 낮 시간의 집안은 평화로웠지만, 지안의 감각은 이미 비정상적으로 예민해져 있었다. 그는 소파에 깊숙이 몸을 파묻고 눈을 감았다. 주변의 모든 소음을 차단하고 오직 벽 너머의 소리에만 집중하려 애썼다. 냉장고가 웅웅거리는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자동차 경적 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그것들을 지워나갔다. 오직 수현의 집에서 들려올지도 모르는 작은 기척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아주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그저 바람이 벽을 타고 흐르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리는 점점 명확해졌다. 그것은 긁는 소리가 아니었다. 누군가 아주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듯한 소리였다. 지안은 숨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소리는 리듬을 타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간절하게 무언가를 호소하는 것처럼, 혹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것처럼 들렸다. 그는 자신의 착각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지만, 소리는 더욱 또렷하게 그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그것은 분명히 인간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것은 수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훨씬 더 가늘고, 쉰 듯하며, 고통에 젖어 있는 누군가의 음성이었다.
지안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환청일 리가 없었다. 그는 다시 벽에 귀를 밀착시켰다. 이번에는 더 분명했다. "...지...안..." 소리는 마치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처럼 들렸다. 순간 지안은 몸을 떨며 벽에서 떨어졌다. 그럴 리가 없었다. 옆집에 사는 수현은 그의 이름을 알지만, 지금 들리는 이 기괴한 목소리는 수현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벽 속에 갇힌 누군가가, 혹은 벽 너머의 보이지 않는 존재가 그를 부르는 소리였다. 공포와 호기심이 뒤섞인 전율이 척추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이제 단순한 소음 항의자가 아니라, 미지의 존재와 조우한 목격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 소리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지안이 물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속삭임은 더욱 집요하게 그를 따라다녔다. 이제는 벽뿐만 아니라 천장과 바닥, 심지어는 자신의 귓가에서조차 그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도와줘..." 혹은 "여기 있어..." 라는 단어들이 파편처럼 흩어져 그의 의식을 어지럽혔다. 지안은 패닉에 빠져 거실을 서성였다. 그는 수현이 외출한 상태라는 점을 다시금 상기했다. 집 안에 아무도 없다면 이 소리는 대체 어디서 나는 것인가. 수현이 설치해 둔 녹음기일까, 아니면 이 건물의 구조적 결함으로 인해 다른 층의 소리가 전달되는 것일까. 하지만 지안의 직관은 다른 답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수현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지나치게 매끄러운 피부, 흐트러짐 없는 머릿결, 그리고 상대를 안심시키기 위해 계산된 친절한 미소. 그 모든 것이 거대한 연극처럼 느껴졌다. 수현은 아마도 이 소리를 매일 듣고 있을 것이다. 아니, 그녀가 이 소리를 만들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안은 문득 수현이 말했던 '건물의 결함'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그녀는 그것을 통해 지안의 의구심을 잠재우려 했지만, 사실 그것은 가장 강력한 힌트였을지도 모른다. 결함이란 곧 틈새를 의미하고, 틈새란 무언가를 숨기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였다.
그는 다시 벽으로 다가가 손톱으로 벽지를 살짝 긁어보았다. 벽지는 견고하게 붙어 있었지만, 그 너머의 콘크리트는 차갑고 딱딱했다. 하지만 지안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벽지가 뜯겨 나가고, 시멘트가 부서지며 그 속에 숨겨진 진실이 드러나는 환영이 보였다. 어두운 공간 속에 웅크리고 있는 무언가, 혹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유기적인 덩어리가 그를 응시하고 있는 모습. 그는 이제 이 소리가 단순한 환청이 아니라, 수현이 숨기고 있는 '비밀'이 보내는 신호라고 확신했다. 그것은 살려달라는 외침일 수도 있고, 혹은 조만간 너도 이렇게 될 것이라는 경고일 수도 있었다.
밤이 깊어갈수록 지안의 집착은 광기로 변해갔다. 그는 더 이상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침대에 누우면 벽 너머의 속삭임이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수현이 돌아오는 소리를 기다렸다. 그녀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다시 그 완벽한 가면을 쓰고 나타날 때, 지안은 그녀의 눈 속에서 진실을 찾아내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메모장에 수현의 행동 패턴과 소음이 발생하는 정확한 시간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범죄 현장의 증거물을 수집하는 수사관의 기록지와 같았다.
지안은 확신했다. 수현의 집 벽 속에는 무언가 끔찍한 것이 들어 있다. 그것이 죽은 사람의 시신일지, 혹은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괴한 생명체일지 알 수 없었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이 수현의 통제 아래 있다는 사실이었다. 수현의 친절함은 그 끔찍한 것을 가리기 위한 포장지에 불과했다. 포장지가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그 안의 내용물은 더욱 추악할 가능성이 컸다. 지안은 자신의 예민함이 이제는 단순한 성격적 결함이 아니라, 진실을 꿰뚫어 보는 특별한 감각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한번 벽에 귀를 댔다. 이제 속삭임은 멈췄지만, 대신 아주 느린 호흡 소리가 들려왔다. 쉭, 쉭, 하며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뱉는 그 소리는 소름 끼치도록 규칙적이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무언가가 바로 벽 너머에서 지안의 숨소리를 함께 듣고 있다는 증거였다. 지안은 입술을 파르르 떨며 미소 지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혼란스럽지 않았다. 수현이 무엇을 숨기고 있든, 그는 반드시 그것을 끌어낼 것이다. 벽이라는 물리적인 장벽이 그들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지만, 지안은 이미 정신적으로 그 벽을 허물고 수현의 가장 깊은 비밀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다음 날, 지안은 평소보다 더 정성스럽게 외출 준비를 마쳤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수현과 마주칠 시간대를 정확히 계산해 복도로 나선 지안은, 예상대로 엘리베이터 앞에서 단정한 원피스 차림의 수현을 발견했다. 그녀는 여전히 눈부시게 하얗고 완벽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지안은 가슴 속에서 요동치는 기괴한 확신을 억누르며, 최대한 자연스럽고 다정한 이웃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수현 씨. 좋은 아침이에요.”
지안의 인사에 수현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화답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맑고 투명했지만, 지안의 귀에는 그 소리가 마치 정교하게 조율된 기계음처럼 들렸다. 지안은 일부러 수현의 곁으로 바짝 다가가며 말을 건넸다. 어제 들었던 그 끔찍한 호흡 소리와 속삭임이 이 여자의 집 안, 정확히는 저 견고한 벽 너머에 도사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자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지안은 자신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감추기 위해 가방 끈을 꽉 쥐었다.
“사실 제가 이번에 인테리어를 조금 바꾸려고 고민 중인데, 수현 씨 집이 워낙 깔끔하고 분위기가 좋아서요. 실례가 안 된다면 나중에 내부를 조금만 구경시켜 주실 수 있을까요? 가구 배치 같은 걸 참고하고 싶어서요.”
지안은 최대한 가벼운 부탁인 것처럼 말을 던졌지만, 시선은 수현의 눈동자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상대의 작은 동요 하나라도 포착해내겠다는 강박적인 의지가 서린 시선이었다.
수현의 미소가 아주 찰나의 순간, 미세하게 경직되었다. 그것은 너무나 짧아서 보통 사람이라면 결코 알아채지 못했을 변화였지만, 신경이 곤두설 대로 곤두선 지안에게는 거대한 균열처럼 보였다. 수현은 잠시 생각하는 척 눈을 가늘게 떴다가, 다시금 완벽한 곡선을 그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거절의 말을 내뱉는 그녀의 태도는 정중함의 극치였으나, 그 속에는 단단한 벽처럼 결코 허락하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
“어머, 제 집이 마음에 드셨나 봐요. 정말 감사해요, 지안 씨. 그런데 제가 성격이 좀 유난스러워서 집안 꼴이 엉망일 때가 많거든요. 지금은 마침 손님을 맞이할 만한 상태가 아니라서요. 정리가 좀 되면 제가 먼저 초대할게요.”
수현의 대답은 매끄러웠다. 군더더기 없는 친절함과 적절한 겸손함이 섞인, 교과서적인 거절이었다. 하지만 지안은 그 답변이 지나치게 정교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미리 준비된 대본을 읽는 것처럼, 상대가 더 이상 파고들 틈을 주지 않는 완벽한 방어막이었다. 지안은 수현의 말속에 숨겨진 '회피'라는 단어를 읽어냈고, 그것은 곧 그녀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강력한 증거로 치환되었다.
“아, 그렇군요. 제가 너무 갑작스럽게 말씀드렸나 봐요. 죄송해요.”
지안은 짐짓 미안한 표정을 지었지만, 머릿속에서는 이미 수현의 집 구조를 다시 그려보고 있었다. 어느 지점에 벽이 있고, 어느 곳에 그 '물건' 혹은 '존재'가 갇혀 있을 것인가. 수현이 거절하면 할수록 지안의 의심은 확신으로, 확신은 다시 광기 어린 집착으로 빠르게 변모해 갔다.
수현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멀어지는 동안, 지안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수현의 걸음걸이, 어깨의 각도, 그리고 문이 닫히기 직전 살짝 돌아본 그 무심한 눈빛까지. 지안은 그녀의 모든 행동을 하나의 암호처럼 분석하기 시작했다. 저 여자는 왜 자신의 공간을 공개하기 싫어할까? 단순히 부끄러움 때문일까, 아니면 들켜서는 안 될 끔찍한 진실이 그곳에 있기 때문일까.
지안의 사고 회로는 이제 수현이라는 인간 자체보다 그녀가 소유한 '공간'과 그 속에 숨겨진 '비밀'에 집중되었다. 결벽증적인 성격 탓에 평소 주변의 무질서를 견디지 못하던 지안에게, 수현의 집이라는 미지의 영역은 반드시 정돈하고 파헤쳐야 할 거대한 오답 노트와 같았다. 수현이 보여주는 과한 친절함은 지안에게 더 이상 호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타인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해 쳐놓은 화려한 포장지이자, 추악한 내면을 가리기 위한 정교한 가면이었다.
'분명히 있어. 그 벽 너머에, 내가 들었던 그 소리의 주인공이 있어.'
지안은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 중얼거렸다. 수현이 정중하게 거절한 그 순간, 지안의 마음속에서는 이미 수현의 집 문을 강제로 열고 들어가 벽지를 뜯어내는 상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친절한 이웃이라는 껍데기를 벗겨내고 그 알맹이를 확인하고 싶다는 욕구가 갈증처럼 그를 괴롭혔다. 이제 수현의 미소는 지안에게 조롱처럼 느껴졌고, 그녀의 부드러운 말투는 은밀한 경고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온 지안은 자신의 벽에 귀를 갖다 댔다. 아직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그는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옆집의 그 벽 너머에서는 무언가가 헐떡이고 있을 것이며, 수현은 그 괴물 같은 비밀을 품은 채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표정으로 일상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라고. 지안은 손톱으로 벽지를 가볍게 긁어보았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정적을 깼고, 지안의 눈에는 기괴한 희열이 서렸다.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선 강박이 지안의 전신을 지배했다. 수현이 교묘하게 회피하면 할수록, 지안은 더 정교한 방법으로 그녀의 영역을 침범하고 싶어졌다. 이제는 단순히 구경시켜 달라는 요청으로는 부족했다. 그는 수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그녀가 집을 비우는 정확한 시간과 빈도를 기록하며, 가장 취약한 틈새를 찾아내기로 결심했다.
그는 책상 위에 놓인 수첩을 펼쳐 수현의 외출 시간을 적어 넣었다. 펜 끝이 종이를 강하게 눌러 찢어질 듯한 자국을 남겼다. 지안은 수현의 친절함 뒤에 숨겨진 그 서늘한 공포의 정체를 반드시 확인해야만 했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것이든 상관없었다. 오히려 더 끔찍할수록 좋았다. 그래야만 자신의 이 미칠 것 같은 집착에 정당한 이유가 부여될 테니까.
지안은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방 안에서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수현이 쌓아 올린 완벽한 성벽은 높았지만, 지안은 이미 그 성벽 아래로 깊은 구멍을 파기 시작했다. 직접 확인하고 싶다는, 아니, 반드시 확인해야만 한다는 파괴적인 욕구가 그의 이성을 잠식해 들어갔다. 이제 지안에게 수현은 다정한 이웃이 아니라, 정복하고 파헤쳐야 할 하나의 거대한 수수께끼이자 전리품이었다.
지안은 책상 위에 놓인 수첩을 펼쳤다. 그곳에는 지난 일주일간 수현의 일거수일투족이 분 단위로 기록되어 있었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진동, 그리고 다시 돌아와 도어락의 전자음이 울리기까지의 정확한 시간. 수현의 생활은 기계처럼 정교했다. 그녀는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오후 두 시에 집을 나섰고, 정확히 네 시간 뒤인 여섯 시에 돌아왔다. 오차 범위는 고작 2, 3분에 불과했다. 지안은 펜 끝으로 수요일 오후의 빈칸을 강하게 내리눌렀다. 수현이 집을 비우는 그 네 시간이야말로, 그녀가 겹겹이 쌓아 올린 가식의 껍데기를 벗겨낼 유일한 기회였다.
지안의 심장은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단순한 긴장감이라기보다는, 오랫동안 기다려온 사냥감을 마주하기 직전의 고양감에 가까웠다. 그는 거울 속의 자신을 보았다. 충혈된 눈과 창백한 안색이 보였지만, 눈동자만은 그 어느 때보다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수현이 숨기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끔찍한 시체든 혹은 말도 안 되는 망상이든 상관없었다. 다만 그 비밀이 자신의 손끝에 닿는 순간, 지안은 비로소 이 지독한 불면과 강박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조용히 숨을 고르며, 수현이 집을 나서는 소리가 들리기만을 기다렸다. 정적만이 감도는 집 안에서 시계 초침 소리가 마치 거대한 망치 소리처럼 귓가를 때렸다.
오후 두 시 정각. 기다리던 소리가 들려왔다. 옆집의 현관문이 닫히는 둔탁한 마찰음이었다. 지안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그는 신발조차 신지 않은 채 맨발로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복도에는 서늘한 공기가 감돌았고, 센서등이 깜빡이며 그를 맞이했다. 지안은 벽에 몸을 바싹 붙인 채 수현의 집 문 앞까지 다가갔다. 문 너머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지안은 느낄 수 있었다. 그 벽 너머, 수현이 정성스럽게 가꾸어 놓은 그 완벽한 공간 속에 무언가 이질적인 것이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미리 준비해 둔 도구들을 살폈다. 수현이 외출하며 잠갔을 문을 어떻게 열 것인가에 대해 그는 이미 수십 번의 시뮬레이션을 마친 상태였다. 최근에 설치된 디지털 도어락의 허점을 파고들거나, 혹은 그녀가 혹시라도 숨겨두었을 비상용 열쇠의 위치를 추측하는 일. 지안은 수현이 평소에 보여주었던 결벽증에 가까운 깔끔함을 떠올렸다. 그런 여자라면 열쇠를 뻔한 곳에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비밀은, 가장 안전하다고 믿는 곳에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지안은 떨리는 손으로 도어락의 패드를 만지작거리며 수현의 습관을 복기했다. 번호판에 남은 지문의 흔적, 혹은 그녀가 무의식중에 눌렀을 법한 숫자들의 조합을 머릿속으로 그려내며 그는 서서히 그 견고한 성벽의 틈새를 찾아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복도 끝에서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는 알림음이 울렸다. 지안의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수현이 나간 지 겨우 5분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설마 잊은 물건이 있어 되돌아온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 방문한 것일까? 지안은 반사적으로 자신의 집 문 뒤로 몸을 숨겼다. 심장이 갈비뼈를 뚫고 나올 것처럼 요동쳤고, 호흡이 가빠졌다. 구두 굽 소리가 복도를 울리며 다가왔다. 규칙적이고 단호한 발소리. 그것은 분명 수현의 것이었다. 지안은 숨을 멈춘 채 문틈 사이로 밖을 살폈다. 수현은 정말로 되돌아온 것이었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자신의 집 앞에 멈춰 섰다.
지안은 공포와 짜릿함이 뒤섞인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만약 지금 문을 열고 나갔다면, 혹은 그녀가 조금만 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면 자신의 존재가 들켰을 것이다. 수현은 한동안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무언가를 찾는 듯 가방 속을 뒤적였고, 이내 짧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몸을 돌렸다. 그녀의 뒷모습은 여전히 우아하고 완벽했지만, 지안의 눈에는 그 모습이 마치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형처럼 보였다. 수현이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지고, 복도에 다시 무거운 정적이 찾아왔을 때 지안은 바닥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아슬아슬한 조우가 남긴 여운은 오히려 그의 욕망에 기름을 부었다. 이제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지안은 다시 일어섰다. 이번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는 수현이 집을 비운 시간이 다시금 확보되었음을 확인하고, 빠르게 그녀의 집 문 앞으로 다가갔다. 손끝이 가늘게 떨렸지만, 눈빛만은 매서웠다. 그는 미리 파악해 둔 도어락의 취약점을 공략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틱 하는 가벼운 기계음과 함께 잠금장치가 풀렸다. 지안은 천천히 문을 밀어 열었다. 문이 열리는 순간, 집 안에서 은은한 라벤더 향기가 풍겨 나왔다. 그것은 지나치게 정갈하고 깨끗한, 마치 모델하우스 같은 공간이었다. 먼지 하나 없는 바닥과 각 잡혀 놓인 가구들이 지안의 결벽증적인 성향을 자극했다.
하지만 지안의 관심은 그런 외적인 완벽함에 있지 않았다. 그는 홀린 듯 거실을 가로질러 수현이 가장 오랫동안 머물렀을 법한 방으로 향했다. 집 안은 기묘할 정도로 고요했다. 오직 지안의 발소리만이 적막을 깨뜨리고 있었다. 그는 거실 벽면에 붙은 커다란 액자와 장식장들을 훑어보며, 수현이 그토록 철저하게 숨기려 했던 '그것'의 위치를 가늠했다. 벽 너머에서 들려오던 그 기괴한 긁는 소리와 속삭임. 그것이 시작되는 지점이 바로 이곳 어딘가일 것이었다. 지안은 마침내 수현의 침실 문 앞에 섰다. 그는 심호흡을 하며 문고리를 잡았다. 이제 문 하나만 더 열면, 수현의 완벽한 가면 뒤에 숨겨진 추악하거나 혹은 경이로운 진실과 마주하게 될 터였다. 지안은 천천히 문을 열고 내부로 발을 들였다.
침실 내부는 거실보다 더 지독할 정도로 정갈했다. 먼지 한 톨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하얀 침구와 각 잡힌 가구들이 지안을 압도했다. 하지만 그 결벽에 가까운 청결함이 오히려 지안의 신경을 긁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벽면을 훑었다. 이곳 어딘가에서 들려왔던 그 소름 끼치는 긁는 소리. 벽 너머에서 들려오던 속삭임의 진원지가 바로 이곳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지안은 방 한가운데 서서 귀를 기울였다. 정적만이 감돌았지만, 그는 벽지 너머에서 무언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기묘한 압박감을 느꼈다. 그는 조심스럽게 벽면으로 다가갔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실크 벽지였으나, 특정 지점에서 미세하게 들뜬 틈새가 보였다. 마치 누군가 안쪽에서 밀어내고 있는 것처럼, 아주 작은 굴곡이 생겨 있었다.
지안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벽지의 끝단을 잡았다. 평소라면 남의 집에 들어와 이런 짓을 하는 것에 결벽증적인 거부감을 느꼈겠지만, 지금은 호기심과 공포가 그 모든 것을 압도했다. 그는 천천히 벽지를 뜯어내기 시작했다. 찌익,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정적을 찢었다. 벽지가 벗겨지자 그 뒤에 숨겨져 있던 낡은 합판과 석고 벽이 드러났다. 그런데 그 표면에 무언가 붙어 있었다. 작은 종이 조각들이었다. 지안은 그것들이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몸을 더 가까이 밀착시켰다. 그것은 정성스럽게 적힌 이름표들이었다.
이름표들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지안은 홀린 듯 그 이름들을 하나하나 읽어 내려갔다. '김민준', '이서윤', '박하늘'……. 생전 처음 보는 이름들이었지만, 그 이름들이 적힌 종이의 질감과 서체는 기묘하게 통일되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 소중한 수집품을 분류해 둔 목록처럼 보였다. 지안의 머릿속에 불길한 가설이 스쳤다. 이 집의 이전 세입자들, 혹은 이 집을 거쳐 간 사람들이 모두 이곳에 기록되어 있다는 생각이었다. 이름표 아래에는 날짜와 짧은 메모가 적혀 있었다. '정숙함', '순응적', '완벽한 조화'. 읽을수록 등골이 서늘해지는 표현들이었다. 수현이 말하던 '완벽한 이웃'이라는 기준이 무엇인지, 그 소름 끼치는 정체가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때, 지안의 시선이 가장 최근의 날짜가 적힌 이름표에 멈췄다. 그것은 다른 이름표들보다 훨씬 깨끗했고, 잉크조차 채 마르지 않은 듯 선명했다. 지안은 숨을 멈춘 채 그 이름을 확인했다. 그곳에는 정갈한 글씨체로 '강지안'이라는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자신의 이름이었다. 아직 이 집의 세입자가 된 적도, 수현의 집 벽 속에 들어간 적도 없는 자신의 이름이 왜 이곳에 적혀 있는 것일까. 경악한 지안의 손에서 벽지 조각이 힘없이 떨어졌다. 그는 자신이 단순히 남의 비밀을 훔쳐보는 침입자가 아니라, 이미 계획된 수집 목록의 일부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포가 해일처럼 밀려왔다. 지안은 뒷걸음질 치며 침실 밖으로 도망치려 했다. 이곳은 더 이상 정갈한 휴식처가 아니라, 거대한 거미줄처럼 설계된 덫이었다. 그는 다급하게 문손잡이를 잡고 돌렸지만,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분명 들어올 때는 잠겨 있지 않았던 문이었다. 지안은 미친 듯이 문고리를 흔들며 밖으로 나가려 애썼다. 하지만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것은 적막만이 아니었다. 도어락이 잠기는 육중한 기계음이 들렸고, 이어 아주 익숙하고 부드러운 발소리가 복도를 따라 다가오고 있었다. 규칙적이고 여유로운, 수현의 발걸음이었다.
지안은 숨을 헐떡이며 벽면의 이름표들과 문 사이를 번갈아 보았다. 도망칠 곳은 없었다. 창문은 높았고, 방 안의 가구들은 마치 그를 가두기 위해 배치된 것처럼 견고하게 놓여 있었다. 그는 문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심장 박동 소리가 귓가를 울렸고,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그는 수현이 자신에게 보여주었던 그 친절한 미소, 다정한 말투, 그리고 완벽한 이웃으로서의 모습들이 모두 이 끔찍한 수집벽을 가리기 위한 정교한 가면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단순히 이웃을 사귄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공간을 채울 새로운 '조각'을 고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지안은 그녀의 완벽한 초상을 완성할 마지막 퍼즐 조각이 되어 있었다.
마침내 침실 문이 천천히 열렸다. 문틈 사이로 수현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이 단정한 옷차림에,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빛만은 생기가 없었고, 마치 물건을 감정하는 수집가처럼 차갑고 무미건조했다. 지안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으려 했지만, 공포로 인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수현은 겁에 질린 지안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다가왔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정과 망치, 그리고 새하얀 벽지가 들려 있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지안 씨. 하지만 당신은 정말 완벽한 조건이었거든요. 예민하고, 정결하며, 누구에게도 주목받지 않는 삶." 수현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그 내용은 잔혹했다. 그녀는 지안의 이름이 적힌 벽면을 애틋하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 집은 아주 고요해요. 당신이 그곳에 들어오면, 더 이상 소음 때문에 괴로워할 필요 없겠죠. 영원히 나의 완벽한 일부가 되는 거예요." 수현이 지안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았다. 그것은 다정한 손길이라기보다, 적절한 위치에 놓기 위해 물건을 잡는 손길에 가까웠다. 지안은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수현의 서늘한 미소가 그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이제 당신의 차례예요." 수현의 선언과 함께 지안은 서서히 벽 속의 어둠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