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태오의 작업실은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지하의 폐쇄적인 공간이었다. 그곳은 기억을 추출하고 가공하는 최첨단 장비들이 기괴한 기계 장치처럼 엉켜 있는, 말 그대로 '세탁소'였다. 태오는 무심한 표정으로 모니터에 흐르는 데이터의 파형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정적을 깨고 무거운 구두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문이 열리고 들어온 남자는 이 도시의 절대 권력자, 시장 권도준이었다. 그는 맞춤 정장의 깃을 세우며 태오의 낡은 책상 위에 두툼한 서류 봉투와 금색 카드를 내려놓았다.
"자네가 기억의 틈새를 메우는 데 일가견이 있다고 들었네."
권도준의 목소리는 낮고 위압적이었다. 그는 태오가 어떤 식으로 시스템의 보안 허점을 이용해 증거를 조작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태오는 시선을 모니터에 고정한 채 냉소적으로 대꾸했다.
"제 서비스는 비쌉니다. 특히 지워야 할 기억이 무거울수록 더 그렇죠."
권도준은 엷은 미소를 지었지만, 눈 속에는 서늘한 살기가 서려 있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살인 혐의가 담긴 기억의 일부를 완전히 삭제하고, 대신 완벽한 무죄의 알리바이를 주입하길 원했다. 그는 태오에게 단순한 보수를 넘어, 상류층으로의 신분 상승과 막대한 부를 약속했다. 그것은 단순한 고용 계약이 아니라, 태오의 인생 전체를 바꿀 수 있는 거대한 미끼였다.
권도준이 떠난 뒤, 태오는 그가 남긴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헛웃음을 지었다. 권력자의 기억을 만지는 일은 언제나 도박이었다. 하지만 그 도박판에 생각지 못한 변수가 끼어들었다. 작업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검사 한서윤이 그림자처럼 나타난 것은 권도준이 나간 지 채 10분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녀는 권도준의 화려함과는 대조적인 날 선 분위기를 풍기며 태오의 앞에 섰다. 한서윤은 태오가 시장의 기억을 세탁하려 한다는 사실을 이미 꿰뚫고 있었다.
"권 시장의 제안이 달콤하겠지. 하지만 그가 약속한 부와 명예가 정말 자네 손에 들어올 것 같나? 그는 필요 없어지면 가장 먼저 자네를 지울 사람이야."
한서윤의 목소리는 차갑고 정확했다. 그녀는 태오가 숨기고 싶어 하는 과거, 즉 그가 기록 말소를 위해 저질렀던 초기 범죄 기록들을 언급하며 압박했다. 태오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그녀는 권도준이 삭제하려는 '진짜 살인 기억'을 복구해 가져오라는 거래를 제안했다. 그 대가로 그녀는 태오의 모든 전과 기록을 완전히 말소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권도준이 주는 것은 화려한 껍데기였지만, 한서윤이 제시한 것은 태오를 옭아매고 있는 족쇄로부터의 완전한 자유였다. 태오는 두 제안 사이에서 팽팽한 긴장감을 느꼈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혹은 양쪽을 모두 이용하든, 그는 이제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야 했다.
태오는 결국 위험한 이중 게임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는 권도준의 계약을 수락하는 동시에 한서윤의 제안을 가슴 속에 품었다. 시장의 기억 속으로 진입하기 위해 태오는 기억 추출기에 자신을 연결했다. 신경 인터페이스가 두피를 파고들고, 의식이 디지털 신호로 변환되어 권도준의 무의식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눈앞에 펼쳐진 권도준의 기억 세계는 거대하고 화려한 성벽 같았지만, 곳곳에 썩은 냄새가 나는 균열이 가 있었다. 태오는 세탁사로서의 능력을 발휘해 권도준이 숨겨놓은 치부의 파편들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그는 권도준의 기억 저장소 깊숙한 곳, 굳게 닫힌 금고 같은 구역으로 접근했다. 그곳에는 권도준이 필사적으로 지우려 하는 살인의 잔상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태오는 조심스럽게 그 기억의 외벽을 긁어내며 내용을 확인했다. 단순한 우발적 살인이 아니었다. 권도준의 기억 속에서 피해자의 얼굴이 흐릿하게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태오는 그 기억의 파형을 분석하며, 이것이 한서윤이 원하는 결정적 증거임을 직감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권도준이 설계한 정교한 기억의 방어 체계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이제 기억의 세탁사가 아니라, 적진의 심장부에 침투한 스파이가 되어 있었다.
태오는 권도준이 보지 못하는 기억의 사각지대에 한서윤에게 전달할 데이터 조각들을 하나둘씩 숨기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기억을 지우는 척하며, 실제로는 가장 핵심적인 진실을 복제해 추출하는 정밀한 작업이었다.
작업이 진행될수록 태오의 정신적 피로도는 극에 달했다. 타인의 기억 속에서 거짓을 심고 진실을 훔치는 일은 자아를 마모시키는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다. 그는 권도준의 무의식이 보내는 거부 반응으로 인해 심한 두통과 환각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는 멈출 수 없었다. 권도준은 그에게 더 많은 권력을 약속하며 그를 압박했고, 한서윤은 정기적으로 연락해 복구 진척 상황을 체크하며 그를 몰아붙였다. 태오는 두 권력자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그들이 서로를 믿게 만드는 동시에 자신만을 믿게 만드는 기묘한 신뢰 관계를 구축했다.
기억 추출기에서 깨어난 태오는 땀에 젖은 몸을 일으키며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의 남자는 이전보다 더 냉소적이고 지쳐 보였지만, 눈빛만큼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이제 권도준의 기억 속에 완벽한 거짓말을 심어두었고, 동시에 한서윤이 열광할 만한 진실의 열쇠를 손에 쥐고 있었다. 시장의 무죄를 만들어내야 하는 계약과 검사의 복수심을 충족시켜야 하는 거래. 이 모순된 두 목표가 태오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거대한 설계도로 합쳐지기 시작했다.
태오는 책상 위에 놓인 두 개의 연락처를 번갈아 보았다. 그는 이제 단순히 보상을 바라는 기술자가 아니었다. 그는 두 사람의 욕망과 위선을 이용해 판을 흔들 수 있는 유일한 설계자가 되었다. 유태오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권도준의 기억 속에 심어놓은 작은 '함정'이 언제 터질지를 계산했다. 위험한 줄타기는 이제 막 시작되었고, 그 끝에 누가 추락할지는 오직 태오만이 알고 있었다.
유태오는 권도준의 의식 심층부로 다시 한번 잠입했다. 겉으로는 살인 혐의를 덮기 위한 정교한 알리바이를 심는 작업이었지만, 태오의 실제 목적은 그 너머에 숨겨진 파편들을 수집하는 것이었다. 권도준의 기억은 거대한 성벽처럼 견고했고, 그가 의도적으로 지워내거나 억눌러둔 기억들은 끈적한 늪처럼 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다. 태오는 시스템의 보안 허점을 이용해 그 늪의 가장 깊은 곳, 권도준조차 잊고 싶어 했던 무의식의 잔해들을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차가운 금속성 기계음이 귓가를 울리고, 시야에는 권도준의 생애가 파편화된 영상으로 스쳐 지나갔다. 무미건조한 정치적 성취와 추잡한 권력욕의 기록들 사이로, 태오는 낯익은 색채의 잔상을 발견했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 태오의 삶에서 가장 찬란했으나 가장 잔인하게 끊겨버린 기억의 색이었다.
영상은 흐릿했지만, 그곳에 서 있는 인물은 분명했다. 어린 시절의 동생이었다. 태오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권도준의 기억 속에 왜 내 동생이 있는 거지? 태오는 떨리는 손으로 인터페이스를 조작해 그 잔상의 초점을 맞췄다. 그것은 단순한 스쳐 지나감이 아니었다. 십수 년 전, 사고로 위장되어 세상에서 사라진 동생의 마지막 순간이 권도준의 시점에서 기록되어 있었다. 태오는 숨을 멈춘 채, 기억의 파편들이 하나의 장면으로 맞춰지기를 기다렸다. 빗줄기가 쏟아지는 어두운 도로, 그리고 길가에 쓰러져 신음하던 어린아이. 그 아이의 눈에 비친 것은 우산을 쓴 채 무심하게 내려다보던 젊은 시절의 권도준이었다. 당시 권도준은 이미 유력한 정치인의 자제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는 아이가 살아있음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작은 실수나 번거로운 절차를 피하기 위해 그대로 차를 몰아 떠났다.
태오는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동생의 죽음은 불운한 사고였다. 적어도 태오는 그렇게 믿으며 평생을 죄책감과 그리움 속에 살아왔다. 하지만 권도준의 기억 속에 남은 진실은 달랐다. 그것은 방관이었고, 의도적인 외면이었으며, 결과적으로는 살인이었다. 권도준은 아이의 가냘픈 손짓과 절박한 외침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기억을 '사소한 소음' 정도로 치부하며 의식의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태오는 전율했다. 단순한 비즈니스 파트너이자, 자신의 신분 상승을 도와줄 수 있는 권력자로 보였던 남자가 사실은 자신의 삶을 뿌리째 흔들어놓은 가해자였다는 사실이 그를 집어삼켰다. 분노는 차갑고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태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는 기억 추출기의 제어판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손끝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지금 당장 이 기억을 추출해 세상에 공개한다면 권도준은 파멸할 것이다. 하지만 태오는 단순히 폭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꼈다. 권도준 같은 인간들은 법망을 피해 나가는 법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적당한 증거와 적당한 사과, 그리고 막대한 합의금으로 또다시 상황을 모면하려 들 것이다. 태오는 입술을 깨물며 생각했다. 단순히 무죄를 만들어주는 세탁사가 아니라, 그가 가장 믿고 의지하는 '완벽한 거짓' 속에 치명적인 독을 심어야 한다. 권도준이 스스로 판 함정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만드는 것, 그것만이 동생의 죽음에 합당한 대가라고 생각했다. 태오의 눈빛에서 비즈니스맨의 냉정함이 사라지고, 포식자의 잔혹한 갈망이 차올랐다. 이제 권도준은 거래 대상이 아니라, 사냥해야 할 먹잇감에 불과했다.
태오는 다시 한번 시스템 설계를 수정했다. 권도준에게 심어줄 거짓 알리바이는 더욱 완벽하게 다듬었다. 하지만 그 완벽함은 곧 거대한 붕괴를 위한 전조였다. 그는 알리바이의 핵심 지점에 아주 미세한 '기억의 균열'을 설계했다. 평소에는 아무런 증상이 없지만, 특정한 자극이나 심리적 압박이 가해지는 순간, 억눌려 있던 동생의 잔상이 폭발적으로 되살아나 권도준의 정신을 잠식하도록 만들었다. 그것은 기억의 시한폭탄이었다. 권도준이 승리를 확신하며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섰을 때, 그가 지운 과거가 환영이 되어 그의 목을 조를 것이다. 동시에 태오는 한서윤 검사에게 전달할 진실의 조각들을 정교하게 분류했다. 하지만 모든 것을 한 번에 주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서윤이 권도준을 몰아붙이게 만들되, 결정적인 순간에 그 칼날이 권도준의 심장을 정확히 찌르도록 유도하는 정교한 가이드라인을 짰다.
이제 판은 완전히 바뀌었다. 권도준은 태오가 자신을 구원해줄 유일한 구세주라고 믿고 있을 것이고, 한서윤은 태오가 진실을 찾아줄 충직한 정보원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태오의 손바닥 위에서 춤추는 인형에 불과했다. 태오는 의식 연결을 해제하고 천천히 눈을 떴다. 어두운 작업실 안, 모니터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르스름한 빛이 그의 무표정한 얼굴을 비췄다. 그는 책상 위에 놓인 권도준의 계약서를 집어 들어 천천히 찢어버렸다. 계약의 내용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 단순한 기억 세탁사가 아니라, 타인의 영혼을 해체하고 재조립하는 설계자가 되었다. 유태오는 깊은 숨을 내쉬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이제 당신이 가졌던 그 오만한 무죄의 기억이 당신을 어떻게 파멸시키는지 지켜보겠어. 그것은 단순한 복수를 넘어선, 정교하게 계산된 파멸의 서막이었다.
유태오는 자신의 작업실 깊숙한 곳,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진공 챔버 속에 몸을 뉘었다. 이번에 설계할 덫은 단순한 데이터 조작으로는 불가능했다. 그는 자신의 뇌세포 일부를 매개체로 삼아, 특정 조건에서만 활성화되는 '기억 역전 바이러스'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신경망의 시냅스 사이에 정교하게 심어진 이 바이러스는 잠복기 동안에는 완벽한 무죄의 기억을 강화하지만, 외부의 특정 신호가 입력되는 순간 이전의 모든 조작된 기억을 뒤집어 끔찍한 진실을 폭발적으로 되살려내는 기폭제가 된다. 유태오는 자신의 신경계를 연결한 전극을 통해 극심한 두통과 함께 데이터 덩어리를 정제했다. 뇌의 일부가 타들어 가는 듯한 작열감이 밀려왔지만, 그는 이를 즐기듯 입술을 깨물었다. 이 고통은 곧 권도준이 겪게 될 정신적 붕괴의 예고편이었다. 그는 바이러스의 활성화 타이밍을 '법원의 무죄 판결 확정' 직후로 정밀하게 세팅했다. 승리의 정점에서 추락할 때의 충격이 가장 클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전극을 제거하고 땀에 젖은 얼굴을 닦아냈다. 이제 하드웨어적인 준비는 끝났다. 남은 것은 이 정교한 기계를 작동시킬 외부의 변수, 즉 사람들을 체스판의 말처럼 움직이는 일이었다. 유태오는 모니터에 띄워진 한서윤 검사의 프로필을 응시했다. 그녀는 정의감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본질적으로는 권도준이라는 거물을 잡았다는 명예욕에 굶주린 사냥개였다. 그런 그녀에게는 단순한 증거보다 '결정적인 한 방'이라는 미끼가 더 효과적일 것이다. 유태오는 의도적으로 보안이 허술한 가상 서버에 권도준의 무죄를 입증할 수 있는 가짜 단서와, 동시에 그가 증거를 조작했다는 정황이 담긴 조작된 기록을 교묘하게 섞어 흘렸다. 그것은 한서윤이 스스로 선택해 들어올 수밖에 없는, 달콤하면서도 치명적인 함정이었다.
며칠 후, 비밀리에 접촉한 한서윤의 눈은 탐욕과 확신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유태오가 건넨 자료들은 권도준의 무죄를 입증하는 듯 보였지만, 동시에 한서윤이 그 자료를 '발견'하고 채택하는 과정에서 법적 절차를 무시한 증거 조작의 흔적을 남기게끔 설계되어 있었다. 유태오는 그녀에게 이 자료만 있다면 권도준을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다고 속삭였다. 한서윤은 유태오가 파놓은 함정인지도 모른 채, 자신의 커리어를 위해 기꺼이 증거 조작이라는 위험한 도박에 가담했다. 그녀는 유태오가 제공한 조작된 단서를 공식 증거로 둔갑시키며 스스로 공범의 굴레를 썼다. 유태오는 그녀가 서류에 서명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이제 한서윤은 권도준을 파멸시켜야만 자신의 조작 사실이 묻히는, 혹은 권도준과 함께 침몰할 수밖에 없는 운명 공동체가 된 것이다.
동시에 유태오는 권도준과의 접촉을 유지하며 그에게 '완벽한 승리'를 약속했다. 그는 권도준의 뇌에 주입된 기억들이 완전히 정착되었음을 알리며, 이제 그 어떤 검사나 판사라도 그의 무죄를 의심할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시켰다. 권도준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마치 신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는 유태오가 심어놓은 가짜 기억 덕분에 자신이 정말로 결백하다고 믿기 시작했다. 인간의 뇌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법이다. 권도준은 자신의 기억 속에 각인된 거짓된 평온함에 취해 방심했다. 그는 재판정에 서는 것이 두려운 심판이 아니라, 자신의 위대함을 공표하는 대관식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유태오는 그런 권도준의 오만한 확신을 보며, 그 확신이 깊어질수록 나중에 찾아올 배신감과 절망이 더욱 처절할 것임을 확신했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유태오는 작업실의 모든 장비를 정리하고 검은 코트를 걸쳤다. 이제 그가 할 일은 관객이 되어 무대 위에서 벌어질 비극을 감상하는 것뿐이었다. 권도준의 기억 속에 심어진 바이러스는 조용히 숨을 죽인 채 판결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고, 한서윤은 자신이 쳐놓은 덫이 사실은 자신을 옭아맬 올가미라는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 법정으로 향하고 있었다. 유태오는 자신의 손끝에 남은 미세한 떨림을 느꼈다. 그것은 긴장이 아니라, 오랫동안 갈구해온 복수가 마침내 완성되었다는 희열이었다.
재판의 마지막 날 아침, 도시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고 법원 주변은 권도준의 무죄를 예견하는 기자들과 구경꾼들로 북적였다. 유태오는 멀리서 그 풍경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권도준은 가장 값비싼 정장을 입고, 세상에서 가장 당당한 표정으로 법정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 뒤를 따르는 한서윤의 얼굴에는 승리를 확신하는 서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적대하면서도, 각자의 욕망을 위해 유태오라는 매개체를 이용했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이 판의 진짜 주인은 그들 사이에서 그림자처럼 움직인 유태오였다. 그는 법정 방청석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곧 시작될 선고의 순간을 기다렸다. 무죄 판결이라는 가짜 구원이 내려지는 순간, 그들의 세계는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무너져 내릴 것이다. 유태오는 시계를 확인하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이제 막이 오를 시간이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그는, 권도준의 무죄 판결이 임박한 재판의 마지막 날을 맞이했다.
법정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고, 방청석의 시선은 모두 피고인석의 권도준에게 쏠려 있었다. 유태오는 구석진 자리에 몸을 묻은 채, 자신의 손끝에서 시작된 정교한 설계가 완성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재판장의 입술이 천천히 떨어졌고, 마침내 무죄라는 두 글자가 법정에 울려 퍼졌다. 권도준의 얼굴에 오만한 승리감이 스쳤다. 그는 마치 예정된 왕관을 쓴 것처럼 턱을 높이 쳐들었고, 곁에 있던 한서윤 검사는 안도감과 찝찝함이 뒤섞인 묘한 표정으로 서류를 챙겼다. 유태오는 입가에 희미한 냉소를 띄웠다. 이제 권도준이 믿고 있는 그 '완벽한 무죄의 기억'은 그를 파멸로 이끌 가장 치명적인 미끼가 될 터였다.
권도준이 승리의 환호를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유태오가 심어둔 기억 역전 바이러스가 활성화되었다. 무죄의 증거로 제출되어 화면에 띄워져 있던 기억 영상의 심층 레이어가 갑자기 뒤틀리기 시작했다. 지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화면의 색조가 급격히 변했고, 정제되었던 기억의 조각들이 날것 그대로의 모습으로 재구성되었다. 그것은 권도준이 그토록 지우고 싶어 했던, 그리고 유태오가 교묘하게 숨겨두었던 진실의 파편들이었다. 법정 내의 모든 스크린이 일제히 점멸하며, 권도준의 실제 기억이 강제로 송출되기 시작했다. 방청객들의 웅성거림은 순식간에 경악 섞인 비명으로 바뀌었다. 화면 속의 권도준은 차가운 눈빛으로 고통스러워하는 동생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가 느낀 것은 죄책감이 아닌 지독한 쾌락이었다.
영상 속의 권도준은 동생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구원줄을 밀어내며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법정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무죄 판결의 환희는 찰나였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살인마를 향한 혐오와 분노였다. 권도준은 당황하며 스크린을 가리켰지만, 이미 늦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조작했다고 믿었던 기억의 덫에 스스로 발을 들인 꼴이었다. 판사는 경악하며 의사봉을 두드렸고, 경위들이 달려들어 권도준의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방금 전까지 시장으로서의 권위를 뽐내던 남자는 이제 초라한 죄인의 모습으로 바닥에 엎어졌다.
그 여파는 한서윤에게도 고스란히 미쳤다. 바이러스는 단순히 영상을 바꾸는 것에 그치지 않고, 증거 조작의 경로와 통신 기록까지 함께 끄집어내 스크린에 나열했다. 한서윤은 창백해진 얼굴로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권도준과 공모해 진실을 덮으려 했던 그녀의 욕망이 이제는 그녀의 목을 죄는 올가미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그녀 역시 공범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경위들에 의해 끌려 나갔다. 유태오는 그 광경을 무표정하게 지켜보았다. 치밀하게 계산된 복수였고,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실행된 완벽한 파멸이었다. 하지만 승리의 쾌감이 밀려와야 할 가슴 속에는 알 수 없는 공허함이 소리 없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 무언가 거대한 것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진동이 느껴졌다. 바이러스의 매개체가 되었던 그의 뇌세포들이 하나둘씩 기능을 멈추며 기억의 회로를 끊어내고 있었다.
유태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에서는 여전히 고함과 소란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그 모든 소리가 마치 먼 곳에서 들려오는 메아리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이 손으로 무엇을 설계했고, 누구를 무너뜨렸는지는 기억났다. 하지만 정작 '왜' 이 일을 시작했는지에 대한 답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가슴 한구석에 소중하게 간직해왔던 어떤 얼굴을 떠올리려 애썼다. 누군가 있었다. 자신이 지켜주지 못했던, 혹은 반드시 복수해주고 싶었던 소중한 존재가 있었다. 하지만 기억의 파편을 잡으려 할수록 그것들은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동생의 이름, 함께 나누었던 어린 시절의 온기, 그 아이가 죽어갈 때 느꼈던 찢어지는 듯한 슬픔까지. 모든 것이 하얗게 지워져 있었다. 바이러스를 심기 위해 자신의 뇌 일부를 제물로 바친 대가는 가혹했다. 원수를 파멸시키는 대가로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지탱하던 유일한 사랑의 기억을 지불한 셈이었다. 유태오는 멍한 눈으로 법정 출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서 권도준의 절규가 들려왔지만, 이제 그 소리는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했다. 그는 복수에 성공했지만, 정작 누구를 위해 이 처절한 전쟁을 치렀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텅 빈 껍데기가 되어 있었다. 법정 문을 열고 나서는 그의 눈앞에 펼쳐진 세상은 지독하리만큼 낯설고 차가웠다. 그는 자신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한 채, 그렇게 군중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