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실 연회장의 공기는 무거웠다.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 모인 귀족들은 서로의 가식적인 미소 뒤로 날 선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고, 그 중심에는 제국의 차기 후계자 자리를 두고 다투는 두 왕자가 있었다. 배나율은 연회장 구석, 조율사 전용 단말기 앞에 서서 차가운 눈으로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허공의 홀로그램 패널 위를 가볍게 스쳤다. 이제 곧 ‘의식 동기화’가 시작될 시간이었다. 참석자 모두가 신경망을 통해 서로의 감정과 기억의 일부를 공유하며 왕자들의 자질을 확인하는 이 의식은, 나율이 설계한 치밀한 덫이 작동하기에 최적의 무대였다.
나율은 리안의 신경망 깊숙한 곳에 심어둔 가짜 트라우마 데이터의 활성화 상태를 확인했다. 붉게 점멸하는 지표는 이미 임계점에 도달해 있었다. 카이안의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 그녀가 조작한 기억들은, 리안이 동기화의 파동을 타는 순간 거대한 공포와 자기혐오의 파도로 변해 그를 덮칠 예정이었다. 리안이 갑작스러운 발작이나 정서적 불안을 보인다면, 대중은 그를 불안정한 지도자로 인식할 것이고, 자연스럽게 카이안이 유일한 대안으로 떠오를 터였다. 나율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띄우며 동기화 시작 버튼을 눌렀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였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그렇게 믿었다.
동기화의 빛이 연회장을 휩쓸자, 사람들의 표정이 몽롱하게 풀리기 시작했다. 의식의 파편들이 공중으로 흩어지며 서로 얽히는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 나율은 단말기를 통해 리안의 상태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했다. 예상대로 가짜 트라우마가 깨어나며 리안의 뇌파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치가 상승하는 속도가 이상했다.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불안을 조성해야 할 데이터가, 마치 폭발하듯 수직으로 치솟고 있었다. 나율의 미간이 좁아졌다. 조작된 기억들이 리안의 기존 자아와 충돌하며 상쇄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를 증폭시키며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뭐지? 이 수치는 계산에 없었는데.”
나율이 다급하게 제어 코드를 입력했지만, 리안의 신경망은 이미 그녀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과부하된 데이터가 역류하며 리안의 의식을 잠식했고, 동기화된 네트워크를 통해 그 광기가 주변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리안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고통스러운 듯 머리를 감싸 쥐었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공포가 아닌 파괴적인 갈망이 서려 있었다. 그가 짧은 비명을 내지르는 순간, 연회장에 연결된 모든 이들의 의식 속에 날카로운 비명과 끔찍한 환각이 동시에 꽂혔다. 사람들은 갑자기 가슴을 부여잡으며 쓰러지거나, 옆에 있던 사람의 멱살을 잡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아수라장이 된 연회장은 순식간에 지옥도로 변했다. 품격 있게 와인 잔을 들고 있던 공작부인이 갑자기 끔찍한 기억의 잔상에 질식해 헐떡였고, 기사들은 환각 속의 적을 향해 허공에 칼을 휘둘렀다. 리안의 신경망에서 뿜어져 나온 오염된 데이터가 동기화 망을 타고 전염병처럼 번진 것이다. 나율은 경악하며 단말기의 출력을 최대치로 높여 리안의 접속을 강제로 끊으려 했다. 하지만 화면에는 ‘동기화 불가: 시스템 과부하’라는 붉은 경고창만 반복해서 떴다. 조작된 트라우마가 리안의 무의식 속에 잠들어 있던 실제의 분노와 결합해, 예측 불가능한 괴물이 되어버린 상태였다.
리안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율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초점이 풀린 채 번뜩이고 있었고, 입가에는 잔인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그는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을 주변에 전이시키며 그 혼란을 즐기고 있는 듯했다. 나율은 등줄기에 서늘한 전율이 일었다. 그녀가 심어둔 것은 단순한 슬픔이나 공포였지, 이런 파괴적인 광기가 아니었다. 리안의 신경망은 이제 단순한 데이터의 집합체가 아니라, 주변의 모든 의식을 빨아들이고 오염시키는 거대한 블랙홀처럼 작동하고 있었다. 나율은 자신의 손끝에서 시작된 작은 조작이 제국의 심장부를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연회장의 소음은 이제 비명과 파괴음으로 가득 찼다. 카이안조차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리안을 바라보며 뒷걸음질 쳤다. 나율은 떨리는 손으로 데이터를 다시 분석했다. 리안의 신경망 내에서 조작 데이터와 실제 자아가 완전히 엉켜버려, 이제는 어떤 부분까지가 가짜이고 어디서부터가 진짜인지 구분조차 할 수 없었다. 더 무서운 것은, 이 폭주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확장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만약 이 상태로 동기화가 유지된다면, 연회장의 모든 참석자는 영구적인 정신 붕괴를 겪게 될 것이고, 그 책임은 전적으로 조율사인 그녀에게 돌아올 것이었다.
나율은 패닉에 빠진 채 단말기를 두드렸지만, 시스템은 이미 그녀의 권한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녀가 만든 정교한 거짓말이 주인을 배신하고 스스로 진화한 꼴이었다. 리안의 광기가 정점에 달하며 연회장의 조명이 격렬하게 깜빡였고, 공중의 홀로그램들이 깨지며 날카로운 파편처럼 흩어졌다. 나율은 깨달았다. 자신이 설계한 이 완벽한 시나리오가 사실은 통제 불능의 재앙이었다는 것을. 그녀는 이제 단순히 카이안의 승리를 돕는 조율사가 아니라, 붕괴하는 제국의 신경망 위에서 위태롭게 서 있는 가해자이자 희생자가 되어 있었다. 연회장은 이제 화려한 무도회장이 아니라, 깨진 기억의 조각들이 난무하는 잔혹한 전장이었다.
나율은 떨리는 손으로 홀로그램 제어판을 미친 듯이 조작했다. 화면 위로 붉은 경고등이 비명처럼 점멸했고, 신경망의 파형은 이미 정상 범위를 벗어나 불규칙한 톱날 모양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리안의 의식 속에 심어놓은 가짜 트라우마가 임계점을 넘어 폭주하며, 주변의 모든 동기화 대상자들을 집단 광기로 몰아넣고 있었다. 연회장은 이제 비명과 파괴음이 뒤섞인 아수라장이었다. 나율은 식은땀이 흐르는 얼굴로 시스템의 심부까지 데이터를 추적했다. 이 붕괴를 멈출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리안의 텅 빈 기억의 구멍, 그 거대한 공백을 메울 만큼 강력하고 정교한 ‘핵심 자아 데이터’가 주입되어야만 시스템이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제어판 한쪽, 황금빛으로 빛나는 카이안의 데이터 뱅크로 향했다. 카이안의 핵심 자아는 제국에서 가장 순수하고 강력한 의식의 결정체였다. 만약 그것을 추출해 리안의 신경망에 강제로 밀어 넣는다면, 폭주는 멈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카이안이라는 존재의 영구적인 소멸, 혹은 자아의 완전한 붕괴를 의미했다. 나율은 숨을 들이켰다. 자신이 설계한 조작의 대가가 누군가의 존재 자체를 지워야 하는 잔혹한 제물이라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지만, 동시에 생존을 위한 계산기가 머릿속에서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때, 혼란 속에서도 냉정함을 유지한 카이안이 나율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의 눈동자에는 공포보다는 오만한 확신이 서려 있었다. 카이안은 주변에서 벌어지는 아비규환에는 관심조차 없다는 듯, 나율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며 낮게 읊조렸다. “나율, 지금 이 상황을 끝낼 수 있는 건 너뿐이라는 걸 안다. 리안이 저렇게 망가진 김에 완전히 제거해 버려. 그 쓰레기 같은 데이터를 완전히 삭제하고 시스템을 초기화해라.”
나율이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지만, 카이안의 압박은 집요했다. 그는 나율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대고 달콤하면서도 서늘한 약속을 속삭였다. “리안만 사라진다면, 네가 이 연회에서 저지른 모든 실수를 내가 덮어주지. 아니, 오히려 너를 내 제국의 가장 높은 곳에 앉혀주마. 조율사가 아니라, 내 곁에서 제국을 함께 다스리는 실권자가 되게 해주겠다는 뜻이다.” 그것은 단순한 제안이 아니라 권력이라는 미끼를 던진 거래였다. 나율은 카이안의 눈 속에서 탐욕스러운 지배욕을 읽었다. 그는 이 재앙조차 자신의 왕좌를 공고히 할 기회로 이용하려 하고 있었다. 나율은 그의 손길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에 숨이 막혔지만, 그가 제시한 미래는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렇게 간단히 흘러가지 않았다.
갑자기 공중의 노이즈가 걷히며 리안의 일그러진 환영이 나율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는 광기에 휩싸여 있었지만, 그 눈빛만큼은 소름 끼칠 정도로 정확하게 나율을 꿰뚫고 있었다. 리안은 찢어지는 듯한 기계음 섞인 목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카이안의 충실한 사냥개 노릇을 하려나 본데, 나율. 네가 내 기억 속에 무슨 짓을 했는지 내가 모를 것 같나?”
리안의 손끝에서 푸르스름한 데이터 조각들이 튀어나와 나율의 제어판 위에 펼쳐졌다. 그것은 나율이 은밀하게 조작했던 로그 기록과 외부 세력과 주고받은 매수 계약서의 복사본이었다. 나율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리안은 그녀가 단순한 조율사가 아니라, 양쪽의 권력자 모두를 기만하며 자신의 이익을 챙긴 배신자라는 결정적인 증거를 쥐고 있었다. “이 데이터가 제국 의회로 전송되는 건 순식간이야. 네가 나를 지우려 한다면, 너 역시 조작범이자 반역자로 몰려 처형대에 오르게 되겠지.” 리안의 협박은 정교하고 치명적이었다. 그는 자신의 파멸을 직감했기에, 함께 무너질 동반자를 찾고 있었다. 나율은 이제 카이안의 야욕과 리안의 원한이라는 두 개의 거대한 파도 사이에 갇혀 버렸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그녀는 누군가를 죽이거나 혹은 스스로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외줄 타기를 시작한 셈이었다.
나율은 혼란스러운 시선으로 카이안과 리안을 번갈아 보았다. 한쪽은 권력을 약속하며 리안의 소멸을 종용하고 있었고, 다른 한쪽은 파멸의 증거를 들이밀며 그녀의 생존을 볼모로 잡고 있었다. 시스템의 과부하는 이제 한계치에 도달해 연회장의 벽면이 데이터의 파편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없었다. 지금 당장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리안의 광기가 네트워크 전체를 집어삼켜 이곳에 있는 모두가 자아를 잃은 껍데기가 될 것이었다.
나율은 떨리는 손가락을 제어판의 ‘실행’ 버튼 위에 올렸다. 카이안의 핵심 자아를 추출해 리안의 빈 공간에 쏟아부어 사태를 잠재울 것인가, 아니면 리안의 요구대로 증거를 인멸하고 카이안의 권력을 배신할 것인가. 혹은 제3의 길을 찾아 두 사람 모두를 희생시킬 방법이 있을까.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도덕적 죄책감보다는 생존을 향한 처절한 계산이 우선했다. 나율은 입술을 깨물며 눈을 감았다. 이제 그녀가 내릴 선택은 단순한 시스템 복구가 아니라, 누군가의 삶을 완전히 파괴하고 그 위에 자신의 안위를 쌓아 올리는 잔혹한 도박이었다. 나율은 천천히, 하지만 단호하게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제국의 운명과 자신의 생존이 걸린,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의 순간이 찾아왔다. 그녀의 심장 박동이 가속되는 가운데, 제어판의 커서가 잔인하게 깜빡였다.
나율의 손가락이 마침내 실행 버튼을 강하게 눌렀다. 찰나의 정적이 흐른 뒤, 제어판의 홀로그램 창이 핏빛으로 물들며 카이안의 핵심 자아 데이터가 강제로 추출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파일 전송이 아니었다. 한 인간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기억, 욕망, 그리고 영혼의 파편들을 찢어발겨 다른 그릇으로 옮기는 잔인한 해체 작업이었다. 나율은 리안의 신경망 속에 뚫린 거대한 공동, 즉 폭주의 근원이 된 그 공백을 향해 카이안의 데이터를 거칠게 밀어 넣었다. 시스템 경고음이 비명처럼 울려 퍼졌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동기화율을 강제로 끌어올렸다. 화면 너머로 카이안의 의식이 비명을 지르는 듯한 파형이 요동쳤다. 그는 자신이 약속한 권력을 누리기 위해 리안을 제거하라고 했지, 자신의 자아가 지워지는 제물이 되라고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나율에게 중요한 것은 카이안의 의사가 아니라, 이 아수라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동기화가 시작되자 리안의 폭주로 인해 일렁이던 연회장의 대기가 급격히 진동했다. 리안의 눈동자 속에 갇혀 있던 광기가 카이안의 데이터라는 거대한 댐에 막혀 서서히 밀려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강제 주입 과정은 매끄럽지 않았다. 서로 다른 두 자아가 하나의 신경망 내에서 충돌하며 거대한 스파크를 일으켰고, 그 충격파는 조율사로서 시스템에 접속해 있던 나율의 신경망으로 고스란히 역류했다.
갑작스러운 역류에 나율의 전신이 경직되었다. 뇌를 직접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이 밀려왔고, 시야가 하얗게 점멸했다. 그것은 카이안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던 격렬한 저항이었다. 자신의 존재가 지워지고 있다는 공포, 그리고 자신을 도구처럼 이용해 리안의 빈틈을 메우려는 나율을 향한 증오가 데이터의 흐름을 타고 그녀의 의식을 공격했다. 나율은 입술을 세게 깨물어 신음을 참아냈다. 입안에서 비릿한 혈향이 퍼졌지만, 그녀는 연결을 끊지 않았다. 지금 여기서 연결을 포기한다면 동기화는 실패할 것이고, 리안의 폭주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결국 이곳에 있는 모두가 의식의 파편으로 분해될 터였다.
'제발, 멈춰...!'
머릿속에서 카이안의 절박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것은 권력을 탐하던 오만한 왕자의 목소리가 아니라, 죽음 앞에 놓인 나약한 인간의 애원이었다. 하지만 나율은 냉정하게 그 목소리를 외면했다. 그녀는 자신의 신경망을 보호하는 방화벽을 닫는 대신, 오히려 더 깊숙이 리안의 신경망 속으로 파고들었다. 고통이 심해질수록 그녀의 생존 본능은 더욱 날카롭게 벼려졌다. 나율은 카이안의 의식이 저항하는 지점을 찾아내어 강제로 짓눌렀다. 타인의 삶을 편집하고 조작해온 그녀에게, 누군가의 자아를 뭉개버리는 일쯤은 익숙한 작업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고통을 견뎌내는 대가로, 리안이라는 거대한 괴물을 잠재울 확실한 열쇠를 쥐어짜 냈다.
역류하는 고통의 파고가 정점에 달했을 때, 마침내 동기화율이 100%에 도달했다. 콰앙, 하는 환청과 함께 리안의 신경망을 휘젓던 광기의 폭풍이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카이안의 핵심 데이터가 리안의 빈 공간에 완전히 박혀 들어가며, 서로를 밀어내던 두 자아의 충돌이 멈춘 것이다. 결과적으로 카이안의 자아는 리안의 의식 속에 흡수되어 영구적으로 소멸했고, 그 희생으로 인해 리안의 붕괴 직전이었던 정신 체계가 강제로 고정되었다. 연회장을 가득 채웠던 소음과 진동이 사라지고,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나율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제어판에서 손을 뗐다. 온몸의 근육이 이완되며 바닥으로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손끝이 여전히 가늘게 떨리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안도감과 함께 서늘한 승리감이 스쳤다.
리안은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세상을 파멸시킬 듯이 포효하던 광기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율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이전의 살벌한 협박이나 증오 대신, 알 수 없는 공허함과 낯선 평온함이 깃들어 있었다. 카이안의 자아가 삭제되며 남긴 잔재가 리안의 신경망을 덮어버린 탓에, 그는 자신이 방금 어떤 일을 겪었는지, 그리고 나율이 자신을 구하기 위해 어떤 잔혹한 선택을 했는지조차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상황은 외견상 완벽하게 종료되었다. 리안은 더 이상 위협적이지 않았고, 연회장의 참석자들도 오염되었던 의식에서 서서히 깨어나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제국의 후계자 구도는 이제 리안의 단독 승리로 기울 가능성이 컸다. 카이안이라는 강력한 경쟁자가 데이터상으로 '삭제'되었기 때문이다. 나율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카이안의 약속했던 권력을 버렸고, 리안의 협박을 무력화시켰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두 사람 모두를 배신하고 이용했다. 누군가는 이를 구원이라 부르겠지만, 나율 스스로는 이것이 가장 효율적인 생존 전략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리안이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그 손길은 다정했으나, 나율은 소름 끼치는 이질감을 느꼈다. 리안의 껍데기 속에 카이안의 파편이 섞여 들어간 지금, 그가 정말 이전의 리안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나율은 그의 손을 잡으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이제 그녀는 리안의 치명적인 비밀과 카이안의 소멸이라는 거대한 패를 모두 쥐게 되었다. 제국의 정점에서 누가 왕관을 쓰든, 그 왕관을 조율하는 실질적인 권한은 이제 오롯이 그녀의 손끝에 달려 있었다. 나율은 차가운 눈빛으로 연회장의 폐허를 훑으며, 다음 단계의 계산을 시작했다.
리안은 제국의 새로운 태양으로 떠올랐다. 카이안이라는 거대한 장애물이 소멸한 자리에는 오직 그만이 유일한 적통이자 권력자로 남았다. 즉위식 날, 화려한 왕관이 그의 머리 위에 얹어지는 순간 나율은 그 어느 때보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황실 신경망의 최고 조율사라는 전무후무한 지위를 얻었고, 리안의 모든 기억과 감정을 관리하는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다. 이제 리안의 일거수일투족은 그녀의 손끝에서 편집되고 조정되었다. 하지만 승리의 환희는 오래가지 않았다. 리안의 내면은 나율이 설계한 대로 정돈되지 않았다. 강제로 주입된 카이안의 핵심 자아 데이터는 완전히 소화되지 못한 채 리안의 의식 속에서 흉측한 종양처럼 자라났다.
리안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타인의 감정에 휩싸여 오열하거나,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낯선 이의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기 시작했다. "이건 내 목소리가 아니야, 나율. 내 머릿속에서 누가 계속해서 비명을 지르고 있어!" 리안이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울부짖을 때마다 나율은 냉정하게 조율 장치를 가동했다. 하지만 조작의 흔적은 깊었고, 인격의 균열은 갈수록 심해졌다. 리안은 때로는 오만한 카이안으로, 때로는 불안에 떠는 리안으로, 그리고 때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광기 어린 괴물로 변모했다. 나율이 심어놓은 거짓 트라우마와 카이안의 잔류 의식이 뒤섞여 그를 서서히 파괴하고 있었다. 리안은 더 이상 온전한 인간이 아닌, 여러 자아가 충돌하는 깨진 유리 조각들의 집합체였다.
리안은 결국 나율이 자신을 구원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난도질해 카이안의 파편을 쑤셔 넣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신경망의 심층부에서 나율이 숨겨놓은 조작의 기록들을 발견했다. 배신감과 분노가 그를 덮쳤지만, 그는 나율을 처형하는 대신 더 잔혹한 방법을 선택했다. 그는 나율을 자신의 곁에 묶어두기로 했다. 그것은 신뢰나 애정이 아닌, 철저한 구속이자 보복이었다. 리안은 나율의 신경망을 자신의 것과 강제로 동기화하는 특수 링크를 설치했다. 이제 나율은 리안의 모든 감정적 고통과 정신적 혼란을 실시간으로 공유해야 하는 운명에 처했다. 리안이 인격 분열로 인해 겪는 극심한 편두통, 자아 상실의 공포, 그리고 카이안의 잔재가 내지르는 끊임없는 비명이 고스란히 나율의 뇌로 쏟아져 들어왔.
"네가 만든 이 지옥을 함께 누려야지, 나의 조율사여." 리안은 초점이 흐릿한 눈으로 나율을 바라보며 낮게 읊조렸다. 그는 나율에게 제국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대리인 자격을 주었지만, 그것은 화려한 감옥의 열쇠일 뿐이었다. 나율은 겉으로는 여전히 고귀한 지위를 유지하며 궁궐의 주인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밤이 되면 그녀는 리안의 침소 곁에서 그가 겪는 정신적 붕괴의 파편들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다. 리안은 의도적으로 자신의 고통을 증폭시켜 나율에게 전송했다. 그녀가도망치려 할 때마다 리안은 신경망의 권한을 이용해 그녀의 의식을 강제로 끌어당겼다. 나율은 리안의 정신적 쓰레기통이 되어, 그가 쏟아내는 모든 증오와 슬픔을 받아내는 소모품으로 전락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율의 자아는 희미해져 갔다. 매일 밤 반복되는 타인의 비명과 뒤섞인 인격들의 소음은 그녀의 고유한 의식을 갉아먹었다. 이제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원했는지, 왜 그토록 권력에 집착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고, 때로는 리안의 슬픔이 자신의 것처럼 느껴져 이유 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녀가 얻은 권력은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자유가 거세된 권력은 그저 무거운 짐이었으며, 리안의 고통을 공유하는 연결 고리는 그녀의 영혼을 옥죄는 쇠사슬이 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망가뜨린 괴물의 곁에서 함께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어느 깊은 밤, 리안의 의식 속에서 카이안의 잔류 의식이 마지막 단말마를 내질렀다. 그 날카로운 비명이 동기화된 링크를 타고 나율의 정신을 강타했다. 나율은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의식은 이미 리안의 광기와 카이안의 원망, 그리고 자신의 죄책감이 뒤섞인 거대한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리안과 자신이 어디서 나뉘고 어디서 합쳐지는지 구분할 수 없었다. 나율은 화려한 비단 옷을 입은 채, 보이지 않는 신경망의 늪 속으로 서서히 가라앉았다. 제국의 정점에 섰다고 믿었던 오만함의 대가는 처참했다. 그녀는 끝내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채, 타인의 고통만이 가득한 공허한 껍데기가 되어 영원한 어둠 속으로 침잠해 갔다. 그것이 조율사 배나율이 설계한 완벽한 계산의 비극적인 결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