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현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홀로그램 키보드를 두드렸다. 정거장 중앙 은행의 보안망은 거대한 성벽 같았지만, 하급 행정관으로서 쌓아온 내부 접근 권한과 가문의 몰락 이후 처절하게 익힌 데이터 조작 기술이 그녀의 무기였다. 화면 위로 붉은색 경고등이 점멸하며 침입자를 감지했다는 알람이 울렸으나, 수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최후의 코드를 입력했다. 심장이 갈비뼈를 때리는 소리가 귓가에 생생하게 들릴 정도로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그녀가 수정해야 할 것은 단순한 숫자 몇 개가 아니었다. 정거장 폐쇄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48시간. 상위 10명에게만 주어지는 탈출권은 이 지옥 같은 '에이전트-X'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구명줄이었다. 수현은 자신의 이름 옆에 적힌 처참한 채권액 수치를 지우고, 상위권의 숫자들을 교묘하게 재배치했다. 기록의 총합은 유지하되, 소수점 아래의 미세한 오차를 이용해 자신의 지분을 부풀리는 정교한 도박이었다.
엔터 키를 누르는 순간, 화면 속의 숫자가 매끄럽게 변했다. 이제 그녀는 공식적으로 정거장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채권자 중 한 명이 되었다. 수현은 참았던 숨을 길게 내뱉으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려 셔츠가 축축하게 달라붙었다. 이것이 들통난다면 단순한 해고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무단 데이터 조작은 정거장 법전상 추방 혹은 강제 노동형에 처해질 중죄였다. 하지만 가문의 빚더미 속에서 평생을 짓눌려 온 그녀에게 도덕적 결벽증 따위는 사치였다. 살아야 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이 궤도 위의 무덤을 떠나야만 했다. 그녀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터미널의 전원을 껐다.
하지만 안도감은 짧았다. 수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채비를 하려던 찰나, 개인 단말기에 날카로운 알림음이 울렸다. 발신인은 강태준. 전 상사이자, 수현이 이 정거장에서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인물이었다. 태준은 정거장의 재무 흐름을 꿰뚫고 있는 실력자였으며, 수현의 모든 경제적 치부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단말기 화면에는 짧고 간결한 메시지 한 줄이 떠 있었다. [내 사무실로 와. 지금 당장.]
수현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설마 벌써 들킨 것일까. 그녀는 조작 과정에서 흔적을 지웠다고 확신했지만, 태준의 감시망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는 수현이 하급 행정관으로 전락한 이후에도 그녀의 재무 기록을 집요하게 추적해 왔다. 그것은 단순한 관심이라기보다, 먹잇감의 상태를 확인하는 포식자의 습성에 가까웠다. 수현은 마른침을 삼키며 단말기를 꽉 쥐었다. 거부할 권리는 없었다. 태준은 여전히 이 구역의 실권을 쥐고 있었고, 그가 마음만 먹으면 수현의 조작 사실을 중앙 통제실에 보고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녀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태준의 사무실로 향했다. 복도를 걷는 내내 천장의 조명이 깜빡거렸고, 정거장의 동력원이 고갈되고 있다는 사실이 피부로 느껴졌다. 공기는 차갑고 건조했으며, 사람들의 눈에는 생존을 향한 광기 어린 집착이 서려 있었다.
태준의 사무실은 정거장의 소음이 완벽하게 차단된 고요한 공간이었다. 그는 넓은 책상 뒤에 앉아 창밖으로 보이는 어두운 우주를 응시하고 있었다. 수현이 들어서자 태준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빛은 냉소적이었고, 입가에는 옅은 조소가 걸려 있었다. 그는 책상 위에 홀로그램 패널 하나를 띄웠다. 그곳에는 수현이 방금 전 조작했던 중앙 은행의 데이터 로그가 실시간으로 흐르고 있었다. 수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가 지웠다고 믿었던 디지털 발자국이 태준의 화면 위에서 선명하게 붉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노수현 행정관, 아니 이제는 '거물 채권자'라고 불러야 하나?"
태준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담긴 압박감은 숨이 막힐 정도였다. 수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굳어 있었다. 태준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왔다. 구두 굽이 바닥에 부딪히는 규칙적인 소리가 수현의 신경을 긁었다. 그는 수현의 바로 앞에 멈춰 서서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중앙 은행의 보안망을 뚫고 숫자를 고치는 대담함이라니. 가문의 명성이 아깝지 않을 만큼 발칙하군. 하지만 잊지 마. 이 정거장의 모든 숫자는 내 손바닥 안에 있다는 걸."
태준은 손가락으로 홀로그램의 특정 지점을 톡 쳤다. 그러자 수현의 조작 흔적이 더 구체적인 증거물로 변하며 화면을 가득 채웠다. 그것은 명백한 유죄 판결문과 다름없었다.
수현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원하시는 게 뭔가요?"
태준은 만족스러운 듯 가볍게 웃었다. 그는 수현의 턱끝을 살짝 들어 올려 강제로 눈을 맞추게 했다. 그의 손길은 다정했으나, 그 눈 속에 담긴 것은 소유욕과 지배욕이었다.
"단순히 널 신고해서 쫓아내는 건 재미없어. 넌 쓸모가 있는 사람이니까."
태준은 다시 책상으로 돌아가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그는 이제 수현을 동료나 부하가 아닌, 자신의 손아귀에 잡힌 작은 새처럼 취급했다. 수현은 직감했다. 이제 자신의 생존권은 조작한 채권액이 아니라, 강태준이라는 남자의 변덕에 달려 있게 되었다는 것을. 가짜 채권이라는 유일한 희망은 이제 태준이 언제든 터뜨릴 수 있는 시한폭탄이 되어 그녀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앞으로 네가 누릴 모든 권리는 내 허락 하에 결정된다. 알겠나?"
태준의 선언은 절대적이었다. 수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통증이 느껴졌지만, 그녀는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겉으로는 굴복했지만, 수현의 머릿속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태준이 약점을 잡았다고 생각하는 이 순간이야말로, 그를 역이용할 수 있는 새로운 판이 짜이는 시점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야 했다. 수현은 고개를 숙인 채, 태준의 그림자 아래로 깊숙이 침잠했다.
태준은 책상 위에 놓인 홀로그램 패널을 가볍게 톡 쳤다. 수현이 조작했던 채권 수치가 붉은색 경고등과 함께 깜빡였다. 그는 마치 흥미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아이처럼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수현은 그 미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적발이 아니라, 상대의 숨통을 완전히 틀어쥐었을 때 나오는 포식자의 여유였다.
"이 정도 수준의 조작이라면 정거장 보안국에서 그냥 넘어가 주진 않겠지. 횡령과 문서 위조, 그리고 중앙 은행망 침입. 이 세 가지만으로도 넌 탈출선은커녕 하층 구역의 쓰레기 처리장으로 추방될 거야. 거기서 남은 생을 보내며 빚을 갚는 게 네 가문의 마지막 전통이 되겠군."
태준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그 안에 담긴 협박은 날카로웠다. 수현은 입술을 깨물며 대답을 기다렸다. 그는 수현이 절망에 빠져 애원하기를 바라는 듯 잠시 침묵을 유지했다. 하지만 수현은 비굴하게 매달리는 대신, 최대한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며 그의 눈을 응시했다. 태준은 그런 그녀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본론을 꺼냈다.
"하지만 내가 굳이 널 정거장 밖으로 내던지는 수고를 하고 싶지는 않아. 효율성 없는 처벌보다는 실질적인 이득이 더 좋으니까. 그래서 제안을 하나 하지. 네 가문이 끝까지 숨기고 있던 '고대 성계의 좌표'를 내게 넘겨. 그러면 네 조작 흔적을 완전히 지워주고, 내 권한으로 널 탈출선 탑승 명단에 올려주지."
수현의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고대 성계의 좌표는 몰락한 가문이 마지막까지 지켜온 유일한 자산이자, 태준 같은 야심가가라면 눈이 뒤집힐 만한 보물이었다. 그것을 넘긴다는 것은 가문의 마지막 자존심을 파는 것일 뿐만 아니라, 태준에게 더 큰 권력을 쥐여주는 꼴이었다.
수현은 잠시 고민하는 척하며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머릿속에서는 빠르게 계산기가 돌아갔다. 태준이 제안한 탈출권은 달콤했지만, 동시에 치명적인 덫이었다. 좌표를 넘겨주는 순간, 그녀는 더 이상 태준에게 필요한 존재가 아니게 된다. 그는 좌표를 확보하자마자 그녀를 폐기하거나, 혹은 좌표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그녀를 더 가혹한 곳으로 끌고 갈 것이 분명했다. 태준은 결코 자비로운 구원자가 아니었다. 그는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움직이는 기계적인 인간이었다.
그럼에도 지금 당장 거절할 선택지는 없었다. 수현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태준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거짓된 신뢰와 굴복의 빛이 서려 있었다. 수현은 최대한 떨리는 목소리로, 하지만 간절함을 담아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좌표를 드리죠. 하지만 제가 정말로 탈출할 수 있다는 보장이 필요해요. 단순히 말뿐인 약속으로는 믿기 어렵습니다."
태준은 예상했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그는 수현의 불신마저 자신의 통제 아래 있다고 믿는 오만함에 빠져 있었다. 그는 책상 위에 놓인 개인 단말기를 툭 밀어내며 말했다.
"보장? 내 말이 곧 보장이다. 하지만 정 불안하다면, 좌표를 전송하는 즉시 네 이름이 적힌 탑승권 발행 내역을 확인시켜 주지. 내 단말기에서 직접 확인해. 내가 널 배신할 이유가 있을까? 좌표만 있다면 굳이 너 같은 하급 행정관 하나를 챙겨줄 필요가 없겠지. 하지만 넌 내 '충성스러운' 부하가 되기로 했으니, 그 정도 대우는 해주겠다."
태준의 오만함은 수현에게 기회였다. 그는 수현이 자신에게 완전히 압도당했다고 믿었기에, 자신의 가장 내밀한 정보가 담긴 개인 단말기를 그녀의 사정거리 안에 둔 것이었다. 수현은 떨리는 손으로 단말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겉으로는 두려움에 떠는 패배자였지만, 속으로는 단말기에 접속하는 순간 실행할 코드를 설계하고 있었다.
단말기의 매끄러운 금속 표면이 손끝에 닿았다. 수현은 태준의 시선을 피하며 조심스럽게 화면을 조작했다. 태준은 그녀가 탑승권 내역을 확인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여유롭게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하지만 수현의 손가락은 이미 보이지 않는 속도로 명령어를 입력하고 있었다.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좌표를 넘기는 것이 아니었다. 태준의 단말기에 접근한 김에, 그가 쥐고 있는 진짜 채권 데이터의 루트 권한을 탈취하는 것이었다.
수현은 태준이 좌표 전송 버튼을 누르기만을 기다리며, 단말기의 백그라운드에서 데이터 덮어쓰기 프로세스를 준비했다. 태준이 좌표를 얻는 순간, 수현은 그가 가진 상위권 채권 데이터를 삭제하고 자신의 조작된 데이터를 그 자리에 박아 넣을 계획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탈출권은 태준의 시혜가 아니라, 시스템상 수현의 정당한 권리가 될 것이었다. 태준의 권한을 이용해 그의 권한을 뺏는, 가장 위험하고도 효율적인 도박이었다.
"뭘 그렇게 오래 보고 있지? 좌표나 빨리 전송해."
태준의 서늘한 재촉이 들려왔다. 수현은 황급히 단말기를 그에게 돌려주며 수줍게, 혹은 겁먹은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죄송합니다. 확인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어요. 지금 바로 전송하겠습니다."
수현은 가짜 좌표 데이터가 포함된 파일을 전송 창에 올렸다. 물론 그것은 진짜 좌표의 일부를 섞어 태준이 곧바로 가짜임을 알아채지 못하게 만든 정교한 미끼였다. 태준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전송 버튼을 눌렀고, 수현은 그 찰나의 순간에 단말기의 시스템 심장부로 침투하는 트리거를 작동시켰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겉으로는 태준의 충실한 사냥개가 되었지만, 수현은 이미 그의 목줄을 쥐기 위한 보이지 않는 덫을 놓았다. 그녀는 태준의 곁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그것은 복종의 제스처이자, 적의 심장부로 진입하는 침입자의 발걸음이었다.
수현은 태준의 옆에 서서 그의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를 유지했다. 태준의 입가에는 승리자의 여유로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는 자신이 수현의 약점을 완벽하게 쥐고 있다고 믿었으며, 그녀가 보낸 좌표가 가짜일 가능성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수현은 고개를 약간 숙여 순종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그녀의 시선은 태준의 손목에 채워진 개인 단말기의 인터페이스 창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미 트리거는 작동했다. 그녀가 미리 심어둔 바이러스는 이제 태준의 보안망을 조금씩 갉아먹으며 시스템의 가장 깊숙한 곳, 즉 관리자 권한의 핵심 영역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굴복하는군. 역시 넌 영리해, 수현아. 내 밑에서 일할 때부터 그랬지.”
태준이 가볍게 콧방귀를 뀌며 단말기의 화면을 넘겼다. 그는 좌표 데이터를 확인하며 만족감을 드러냈지만, 그 과정에서 단말기의 동기화 모드를 활성화하는 실수를 범했다. 외부 기기와의 데이터 교환을 위해 잠시 열어둔 보안 틈새는 수현이 기다리던 완벽한 진입로였다. 수현은 태준의 어깨 너머로 보이지 않게 손가락을 까딱이며 자신의 소형 단말기와 연결된 가상 키보드를 조작했다. 정교하게 설계된 바이러스가 태준의 방화벽을 무력화하고, 그의 개인 식별 코드와 관리자 토큰을 복제하기 시작했다. 태준은 자신의 권한이 조금씩 누출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곧 다가올 탈출의 기쁨에 도취해 있었다. 수현의 심장은 빠르게 뛰었지만, 표정만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태준이 스스로 문을 더 넓게 열어주기만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태준은 수현의 태도가 의외로 순순히 변한 것에 대해 묘한 정복감을 느꼈다. 그는 수현이 가진 가문의 유산이 얼마나 절실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그녀가 결국 자신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다고 확신했다. 그는 수현의 충성심을 시험하려는 듯, 혹은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하려는 듯 단말기의 제어 권한 일부를 그녀에게 일시적으로 개방했다. 좌표의 세부 내용을 함께 검토하며 자신이 얼마나 정밀하게 분석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려는 오만한 행동이었다.
“여기 이 성단 좌표, 약간의 오차가 있는 것 같은데. 네가 실수한 건가, 아니면 나를 시험하려는 건가?”
태준이 날카롭게 물으며 수현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수현은 당황한 척 눈동자를 가늘게 떨며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죄송합니다. 오래된 기록이라 전송 과정에서 노이즈가 섞였을지도 몰라요. 제가 다시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태준의 단말기 화면을 터치했다. 태준은 그녀의 손길이 닿는 것을 허용했고, 이는 수현에게 결정적인 기회가 되었다. 수현의 손가락이 화면에 닿는 순간, 대기하고 있던 바이러스가 태준의 인증 토큰을 완전히 가로챘다. 시스템 내부에서는 소리 없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수현의 프로그램은 태준의 보안 계층을 하나씩 무너뜨리며, 정거장 중앙 은행의 채권 데이터베이스로 향하는 최단 경로를 확보했다. 태준은 여전히 화면상의 좌표 수치에 집착하며 수현의 실수를 지적하고 있었지만, 정작 그의 디지털 자아는 수현의 손아귀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수현은 입술을 깨물며 전율했다. 태준이 허용한 '깊은 권한'은 그에게는 단순한 호의였으나, 수현에게는 그의 목을 조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밧줄이었다.
침투는 완벽했다. 수현의 단말기 화면에 '관리자 권한 획득: 강태준'이라는 메시지가 짧게 점멸했다. 이제 태준의 개인 단말기는 껍데기에 불과했다. 모든 제어권은 수현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 넘어왔고, 그녀는 이제 태준의 모든 재무 기록과 채권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수정할 수 있는 절대적인 위치에 섰다. 수현은 천천히 손을 떼고 다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태준은 여전히 자신이 상황을 주도하고 있다고 믿으며 거드름을 피웠지만, 수현의 눈에는 이제 그가 가련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수현은 자신의 단말기 속에 띄워진 실행 버튼을 응시했다. 그 버튼 하나만 누르면 태준이 평생을 바쳐 모은 채권액은 순식간에 증발할 것이며, 그 빈자리는 그녀가 조작한 가짜 데이터로 채워질 것이다. 태준의 상환액을 삭제하고 자신의 것으로 덮어쓰는 순간, 탈출선 탑승 명단 상위권의 이름은 바뀌게 된다. 그는 배신자의 낙인이 찍힌 채 폐쇄될 정거장에 남겨질 것이고, 수현은 그의 권리를 훔쳐 당당히 탈출권을 거머쥐게 될 터였다.
“이제 만족하시나요, 강태준 씨?”
수현의 목소리가 이전보다 훨씬 낮고 서늘하게 울렸다. 태준은 순간 위화감을 느꼈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수현은 단말기의 제어권을 완전히 쥐고 있었으며, 실행 버튼 위에 손가락을 올린 채 그가 느낄 절망의 순간을 계산했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한 번의 클릭이었다. 수현은 승리감과 함께 밀려오는 지독한 쾌감을 느끼며, 태준의 오만한 얼굴을 향해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수현은 망설임 없이 실행 버튼을 눌렀다. 화면 위로 데이터 스트림이 폭포처럼 쏟아졌고, 태준의 이름 옆에 찍혀 있던 천문학적인 채권 숫자들이 빠르게 깎여 내려가기 시작했다. 0. 완전한 무(無)의 상태가 된 숫자를 확인한 수현은 곧바로 자신의 이름을 최상단으로 끌어올렸다. 정거장의 모든 권리를 흡수하듯, 가공된 숫자들이 그녀의 계정으로 옮겨붙었다. 이제 이 정거장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인간은 강태준이 아니라 노수현이었다.
“뭐 하는 거야? 지금 뭘 건드린 거지?”
태준이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는 급히 단말기를 낚아채려 했으나, 이미 관리자 권한은 수현의 손에 있었다. 화면에 뜬 ‘권한 변경 완료’라는 메시지가 두 사람 사이의 공기를 차갑게 갈랐다. 태준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지고 경악과 분노가 들어찼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수현을 바라보다가, 짐승처럼 달려들어 그녀의 멱살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그의 손가락 끝이 수현의 목을 압박했지만, 수현은 오히려 고개를 빳빳이 든 채 그를 비웃었다. 승리자의 미소였다.
정거장 폐쇄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1시간도 되지 않았다. 그 순간, 복도 끝에서 무거운 군화 소리가 들려왔다. 보안 요원들이었다. 그들은 단말기의 최신 업데이트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수신하고 있었다. 요원들이 방 안으로 들이닥쳤을 때, 그들이 본 것은 당황하여 멱살을 잡고 있는 태준과, 시스템상 ‘최상위 채권자’로 등재된 수현이었다. 보안 팀장은 태준의 신분증을 확인하더니 냉정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현재 당신은 아무런 권리가 없는 무권리자이며, 즉시 강제 퇴거 구역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태준은 억울함을 호소하며 소리를 질렀지만, 보안 요원들에게 그것은 소음에 불과했다. 그들은 태준의 양팔을 꺾어 강제로 끌어내기 시작했다. 바닥에 질질 끌려가면서도 태준은 수현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분노로 이글거리던 그의 눈빛은 어느 순간 묘하게 변했다. 그것은 패배자의 절망이 아니라, 함정에 빠진 사냥감을 바라보는 포식자의 서늘한 조소였다. 태준은 입가에 희미한 비웃음을 띄우며 낮게 읊조렸다.
“정말… 네가 이겼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노수현.”
수현은 그의 말을 무시하며 등을 돌렸다. 요원들이 태준을 완전히 끌고 나간 뒤, 그녀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탈출선 승강장으로 향했다. 가문의 몰락 이후 평생을 따라다녔던 빚의 굴레, 강태준이라는 거대한 벽, 그리고 생존을 향한 처절한 갈증이 단 한 번의 클릭으로 해소된 기분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쟁취한 숫자들이 단순한 데이터가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향하는 티켓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승강장에 도착하자 거대한 탈출선이 육중한 엔진 소리를 내며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현은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을 인증하고 기내로 발을 들였다. 이제 정거장의 소음과 공포는 뒤로 한 채, 은하계의 어느 평온한 행성으로 돌아가 왕년의 귀족처럼 군림할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탈출선이 궤도를 이탈해 가속을 시작했을 때, 수현의 개인 단말기에 알람이 울렸다. 시스템이 자동으로 전송한 ‘최종 채권 확정 보고서’였다. 수현은 가벼운 마음으로 메시지를 열었다. 그러나 화면에 나타난 문구를 확인한 순간, 그녀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것은 단순한 채권 리스트가 아니었다.
화면에는 ‘채무 인수 계약서’라는 붉은 글씨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태준이 가지고 있던 데이터는 사실 그가 소유한 자산이 아니라, 정거장 전체가 짊어지고 있던 막대한 부채의 총합이었다. 태준은 수현이 자신의 데이터를 덮어쓸 것을 미리 예상하고, 정거장의 모든 빚을 한 사람에게 몰아줄 수 있는 정교한 가짜 채권 덫을 놓아두었던 것이다. 수현이 ‘최상위 채권자’라고 믿었던 그 자리는 사실 ‘최대 채무자’의 자리였다. 그녀가 태준의 이름을 지우고 자신의 이름을 올린 행위는, 정거장의 모든 부채를 스스로 인수하겠다는 법적 서명을 완료한 것과 다름없었다.
수현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다시 단말기를 조작해 취소하려 했지만, 이미 탈출선은 정거장의 통신 범위를 벗어났고 데이터는 은하계 중앙 은행의 메인 서버로 전송되어 확정된 상태였다. 이제 그녀는 단순한 파산자가 아니었다. 은하계 전체의 금융 시스템이 추적하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규모의 빚을 진 ‘최악의 채무자’가 된 것이다.
창밖으로 멀어지는 정거장을 바라보며 수현은 태준의 마지막 비웃음을 떠올렸다. 그는 처음부터 그녀의 탐욕과 계산을 이용해 자신의 짐을 떠넘길 계획이었다. 탈출선은 안전하게 비행하고 있었지만, 수현은 자신이 거대한 감옥에 갇혔음을 깨달았다. 이제 그녀의 앞날에는 안락한 귀족의 삶 대신, 빚 독촉을 피해 은하계 구석구석을 전전해야 하는 도망자의 삶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현은 텅 빈 기내에서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으나, 기계적인 안내 방송만이 평온하게 도착 예정 시간을 알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