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온 거주구의 공기는 이미 죽어가고 있었다. 에너지 코어의 임계점 도달까지 남은 시간은 72시간. 붉은 경고등이 복도를 주기적으로 훑을 때마다 사람들의 눈동자에는 생존에 대한 갈구와 타인에 대한 혐오가 동시에 스쳤다. 탈출 캡슐의 좌석은 극소수였고, 그 티켓을 쥔 자들은 이미 보이지 않는 성벽을 쌓고 있었다. 황예린은 중앙 제어실의 소음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다시금 확인했다. 통신관이라는 직함은 권력자들의 속삭임을 가장 가까이서 들을 수 있는 특권이자,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소모품이라는 뜻이었다.
총독 카이로스는 예린을 자신의 집무실로 호출했다. 화려한 금색 장식들이 가득한 방이었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거주구의 외벽은 이미 균열이 가기 시작해 섬뜩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카이로스는 고급한 시가 연기를 내뿜으며 예린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자애로운 지도자의 그것이 아니라, 사냥감을 가늠하는 포식자의 그것에 가까웠다. 그는 책상 위에 홀로그램 지도를 띄웠다. 반군들의 은신처와 예상 도주 경로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지도였다.
"예린, 너는 영리한 아이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 거야." 카이로스가 낮게 읊조렸다. "세레나가 어디로 도망치려 하는지, 그 탈출 좌표만 내게 넘겨라. 그러면 너의 이름은 생존자 명단 최상단에 기록될 것이다. 안전한 귀환, 그리고 새로운 정착지에서의 보장된 지위. 이것이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의 거래다."
카이로스의 제안은 달콤했지만, 예린은 그 뒤에 숨겨진 서늘한 칼날을 느꼈다. 좌표를 넘기는 순간, 그녀는 더 이상 필요 없는 정보원이 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선택지가 없었다. 여기서 거절한다면 당장 오늘 밤이라도 산소 공급이 끊긴 구역으로 밀려날 수 있었다. 예린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수락의 뜻을 비쳤다. 카이로스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으나, 그 미소는 예린의 기억 속에 각인된 과거의 배신과 닮아 있었다.
집무실을 나온 예린이 향한 곳은 거주구 하층의 폐기물 처리장 근처, 반군의 비밀 연락망이 닿는 지점이었다. 그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반군 지도자 세레나였다. 세레나는 카이로스와는 대조적으로 낡은 군복을 입고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더 날카롭고 공격적이었다. 그녀는 예린이 다가오자마자 거칠게 손목을 잡아끌어 어두운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주변에는 무장한 반군들이 경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카이로스가 너에게 접근했겠지. 그 늙은 여우가 무슨 제안을 했든 잊어버려." 세레나가 예린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우리는 카이로스가 코어를 인위적으로 조작해 일부러 위기를 만들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필요해. 그 증거만 가져온다면, 너를 단순한 정보원이 아니라 우리 반군의 새로운 지도자급 인물로 추대하겠다. 권력과 생존, 둘 다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야. 어때, 내 제안이 더 매력적이지 않나?"
예린은 세레나의 강렬한 눈빛을 마주하며 잠시 침묵했다. 한쪽은 기득권의 안락한 보장을, 다른 한쪽은 전복된 세계의 새로운 권력을 약속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린은 알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이 말하는 '보장'과 '약속'이 얼마나 가벼운 것인지를. 과거에 그녀는 양측의 스파이 노릇을 하다가 정체가 탄로 났을 때, 카이로스는 그녀를 고문실로 보냈고 세레나는 그녀를 외면했다. 그때의 트라우마가 등줄기를 타고 서늘하게 흘러내렸다. 이번에도 그들은 예린을 도구로 쓰고 버릴 생각일 터였다.
그럼에도 예린은 입술을 살짝 올리며 세레나의 제안 역시 수락했다. "좋아요. 증거를 찾아보죠." 세레나는 승리감에 도취한 표정으로 예린의 어깨를 툭 쳤다. 예린은 그 손길에서 느껴지는 오만함을 기억 속에 저장했다. 이제 그녀는 양쪽 모두의 신임을 받는, 혹은 그렇게 믿게 만드는 위험한 줄타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한쪽에는 좌표를, 다른 한쪽에는 증거를 주겠다는 거짓 약속을 뿌려둔 상태였다.
제어실로 돌아가는 길, 예린의 머릿속은 빠르게 회전했다. 단순히 살아남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두 권력자가 서로를 믿지 못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자신만이 결정적인 열쇠를 쥐고 있어야 했다. 그녀는 자신이 가진 접근 권한을 이용해 카이로스와 세레나의 통신 기록을 교차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서로에게 숨기고 있는 욕망과 공포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지점에서 서로의 목을 물어뜯을지를 계산하는 작업이었다.
예린은 단말기 앞에 앉아 빠르게 코드를 입력했다. 카이로스가 요구한 세레나의 좌표 정보와 세레나가 원하는 코어 조작 증거, 그 두 가지 데이터를 동시에 수집하기 위한 필터링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화면 위로 복잡한 데이터 스트림이 쏟아졌고, 예린의 눈동자에는 푸른빛의 코드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일부러 정보를 조금씩, 아주 조금씩만 흘리기로 결정했다. 상대가 갈증을 느끼게 만들어야 더 큰 것을 내놓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먼저 카이로스에게 세레나의 가짜 이동 경로 중 일부를 전송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세레나에게는 코어 조작의 정황이 담긴 불완전한 로그 기록의 일부를 보냈다. 양측 모두 '거의 다 왔다'는 확신을 갖게 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의존도를 극대화하려는 전략이었다. 정보의 조각들이 전송될 때마다 예린의 심장은 빠르게 뛰었지만, 표정만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이제 주도권은 서서히 그녀에게로 넘어오고 있었다.
72시간이라는 시한폭탄이 째깍거리고 있었다. 거주구의 진동은 점점 심해졌고, 사람들의 비명 섞인 소란이 제어실 밖까지 들려왔다. 하지만 예린은 그 혼란 속에서 기묘한 평온함을 느꼈다. 이제 그녀는 단순한 말단 통신관이 아니었다. 두 권력자의 생사여탈권을 쥔 보이지 않는 손이 되어, 오리온의 최후를 향한 도박판의 설계자로 거듭나고 있었다. 예린은 화면 속의 '전송 완료' 메시지를 확인하며 조용히 읊조렸다. "이번에는 절대로 버려지지 않아."
예린은 카이로스와 세레나가 주고받은 암호화 통신 로그의 파편을 하나씩 맞춰나갔다. 겉으로는 서로를 증오하며 예린을 통해 상대의 약점을 잡으려 혈안이 된 것처럼 보였지만, 데이터의 심층부에서 발견된 교차 지점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두 권력자는 이미 은밀한 합의에 도달해 있었다. 그들은 예린이라는 유용한 도구를 이용해 서로의 패를 확인하고, 탈출 캡슐의 마지막 좌석을 나누어 가진 뒤,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그녀를 우주 공간으로 방출해 입막음하기로 약속했다. 화면 너머로 흐르는 텍스트들이 마치 비웃음처럼 보였다. '소모품'이라는 단어가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로그의 행간에는 그녀를 처리할 구체적인 타이밍과 방식이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그 순간, 예린의 귓가에 환청처럼 과거의 비명이 들려왔다. 양쪽 진영을 오가며 정보를 팔던 시절, 정체가 탄로 났을 때 그녀가 겪어야 했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쳤다. 어두운 취조실의 습한 공기, 살갗을 파고들던 전기 자극, 그리고 믿었던 이들이 냉소적으로 내뱉던 배신자라는 낙인. 그때의 고통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신체적인 반응으로 되살아났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고, 호흡이 가빠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때의 그녀는 그들의 자비에 매달렸지만, 지금의 그녀는 그들의 생존 조건 자체를 쥐고 있었다. 예린은 떨리는 손을 꽉 쥐어 진정시키며 입술을 깨물었다. 단순한 생존은 이제 충분하지 않았다. 그녀를 도구로 여긴 오만함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해야 했다.
"결국 똑같구나, 당신들은."
예린이 낮게 읊조렸다. 그녀의 눈빛에서 두려움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서늘한 증오와 계산이 채웠다. 이제 그녀의 목표는 안전한 탈출이 아니라, 두 사람이 서로를 물어뜯게 만드는 완벽한 파멸의 설계였다. 그녀는 제어실의 메인 콘솔에 접속해 시스템의 가장 깊숙한 곳, 관리자 권한조차 접근하기 까다로운 코어 제어 영역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예린은 카이로스가 세레나에게 보낸 가짜 좌표 데이터 속에 교묘하게 트로이 목마를 심었다. 그리고 세레나가 요청한 코어 조작 증거 파일의 메타데이터를 수정해, 마치 카이로스가 이미 반군과 내통하며 배신을 준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두 사람이 서로의 메시지를 확인하는 순간, 그들은 상대가 자신을 배신하려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될 것이다. 불신은 이미 그들 사이에 존재했고, 예린은 그 작은 균열에 거대한 쐐기를 박아 넣은 셈이었다. 그녀는 화면 속에서 깜빡이는 커서를 응시하며, 그들이 느낄 당혹감과 분노를 상상했다. 그것은 그녀가 과거에 겪었던 고통에 비하면 아주 작은 조각에 불과했지만, 시작점으로서는 충분했다.
작업 도중, 제어실의 문이 열리며 카이로스의 전령이 들어왔다. 전령은 오만한 표정으로 예린에게 다가와 짧은 메시지를 전달했다.
"총독님께서 준비가 끝났다면 즉시 보고하라고 하신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통신관."
예린은 무표정한 얼굴로 전령을 바라보았다. 전령의 눈에는 그녀가 그저 운 좋게 살아남아 총독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가련한 생존자로 보였을 것이다. 예린은 일부러 순종적인 태도를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전달하겠습니다. 곧 모든 정리가 끝날 것입니다."
전령이 나가자마자 예린의 얼굴에서 가식적인 미소가 사라졌다. 그녀는 다시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이제 가장 중요한 단계가 남았다. 단순히 정보를 조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들이 탈출 캡슐에 올라타는 순간, 그곳이 구원이 아닌 함정이 되게 만들어야 했다. 그녀는 시스템 로그를 뒤져 거주구의 심장부인 에너지 코어의 강제 제어 권한을 찾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운영 체제로는 접근할 수 없는, 비상시 폐기 절차에 사용되는 숨겨진 명령어가 필요했다.
수많은 데이터 더미와 암호화된 폴더를 훑던 예린의 눈에 붉은색으로 표시된 시스템 파일 하나가 들어왔다. 'Core_Overload_Emergency_Protocol'. 그것은 코어의 에너지를 강제로 폭주시켜 특정 구역을 과부하시키는 위험한 코드였다. 원래는 거주구가 완전히 파괴되기 전, 핵심 데이터를 외부로 송출하기 위해 최후의 에너지를 쥐어짜는 용도로 설계된 것이었다. 이 코드를 확보해 탈출 캡슐의 작동 로직과 연결한다면, 특정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을 때 캡슐의 사출 시스템을 마비시키거나, 혹은 사출 직후 캡슐 내부의 환경 제어 장치를 무력화할 수 있었다.
예린은 숨을 죽인 채 코드를 복제해 자신의 개인 단말기에 저장했다. 이 코드를 손에 넣었다는 것은, 이제 탈출 캡슐의 '열쇠'가 카이로스나 세레나가 아닌 그녀의 손에 있음을 의미했다. 그녀는 캡슐의 작동 조건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좌석에 앉아 버튼을 누르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설정한 특수한 인증 키가 입력되어야만 안전하게 궤도를 이탈하도록 설계를 변경했다. 만약 인증 없이 강제로 사출된다면, 코어의 과부하 에너지가 캡슐의 엔진을 태워버려 우주 미아가 되거나 캡슐 자체가 폭발할 위험이 있었다.
"이제 당신들이 선택해 봐. 누가 먼저 배신할지."
예린은 변경된 작동 조건을 최종 확인하고 시스템에 은밀하게 적용했다. 이제 겉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탈출 캡슐이었지만, 내부적으로는 예린의 명령 없이는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는 정교한 덫이 되었다. 그녀는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대며 창밖으로 보이는 붉게 타오르는 거주구의 외벽을 바라보았다. 72시간의 카운트다운은 계속되고 있었고, 그녀는 이제 단순한 생존자가 아닌 이 게임의 유일한 지배자로서 그들의 몰락을 기다릴 준비를 마쳤다.
황예린은 제어 콘솔 앞에 앉아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손끝이 가볍게 움직일 때마다 모니터 너머 캡슐 내부에 갇힌 카이로스와 세레나의 상황이 실시간으로 전송되었다. 두 권력자는 서로를 향해 가식적인 신뢰를 보내고 있었지만, 예린은 그들의 믿음이 얼마나 얄팍한지 잘 알았다. 그녀는 준비해둔 가짜 신호 체계를 가동했다. 먼저 카이로스의 개인 단말기에 세레나가 캡슐의 비상 탈출 장치를 독점하려 했다는 조작된 로그 기록을 전송했다. 동시에 세레나에게는 카이로스가 이미 그녀를 제거하고 혼자 떠나기 위해 산소 공급량을 조절했다는 경고 메시지를 띄웠다.
"이제 서로의 진심을 확인해 보시죠."
예린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단말기의 알람 소리가 캡슐 내부의 정적을 깼다. 처음에는 당혹감이 역력했던 두 사람의 표정이 빠르게 의심으로 변했다. 카이로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세레나를 쏘아보았고, 세레나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치며 카이로스의 움직임을 경계했다. 서로를 이용해 살아남으려 했던 동맹은 단 몇 초 만에 무너져 내렸다. 그들은 서로가 자신을 배신했다는 확신에 사로잡혔고, 좁은 캡슐 안에서 오가는 대화는 이제 협상이 아닌 날 선 공격과 비난으로 바뀌어 있었다. 예린은 그 광경을 관찰하며, 그들이 겪을 공포가 자신이 당했던 고통의 아주 작은 조각이라도 되기를 바랐다.
카이로스가 먼저 소리를 질렀다. "이 비열한 여자! 감히 나를 속이려 들어?" 세레나 역시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속인 건 당신이야, 카이로스! 끝까지 오만하게 굴더니 결국 이런 짓을 꾸몄구나!" 두 사람의 목소리는 통신망을 타고 예린의 귀에 선명하게 들려왔다. 불신은 독처럼 빠르게 퍼졌고, 그들은 이제 상대방이 캡슐의 제어권을 쥐고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굳게 믿기 시작했다.
불신은 곧 폭력으로 이어졌다. 좁은 공간에서 서로를 믿지 못하는 두 권력자의 충돌은 처절했다. 카이로스는 권위적인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세레나의 멱살을 잡아 벽으로 밀쳐냈고, 세레나는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휘둘러 그에게 저항했다. 그들은 더 이상 총독과 반군 지도자가 아니었다. 그저 좁은 철제 상자 속에 갇혀 서로를 뜯어먹으려는 짐승들에 가까웠다. 예린은 화면을 통해 그들이 뒹굴며 서로의 얼굴을 할퀴고 때리는 모습을 무미건조하게 지켜보았다.
"그만해! 우리가 싸울 때가 아니야!"
세레나가 비명을 질렀지만, 이미 이성을 잃은 카이로스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세레나의 머리채를 잡아 바닥에 내팽개쳤고, 세레나는 고통 속에서도 그의 다리를 붙잡아 끌어내렸다. 둔탁한 타격음과 거친 숨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그들은 서로의 숨통을 조이며 누가 더 우위에 있는지를 증명하려 애썼지만, 결과적으로 얻은 것은 찢어진 옷가지와 피투성이가 된 얼굴뿐이었다. 치명적인 상처는 아니었으나, 격렬한 몸싸움 끝에 두 사람은 완전히 탈진해 바닥에 널브러졌다.
피 섞인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서로를 노려보는 그들의 눈에는 증오만이 남았다. 한때 오리온 거주구를 지배하고 좌지우지했던 이들이, 고작 작은 캡슐 안에서 서로의 살점을 뜯어내며 처참하게 망가진 모습은 예린에게 묘한 쾌감을 주었다. 그녀는 그들이 서로를 죽이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다시는 서로를 신뢰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음을 확인했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것은 오직 탈출이라는 갈망뿐이었으나, 그 갈망이야말로 예린이 설계한 가장 잔인한 덫의 시작이었다.
예린은 이제 마지막 단계로 진입했다. 그녀는 제어 시스템의 깊숙한 설정 창을 열어 생명 유지 장치의 출력 값을 수정했다. 원래 두 명 이상의 인원을 충분히 지탱할 수 있었던 산소와 에너지 공급량을 단 한 명분으로 강제 고정했다. 이는 캡슐이 사출된 이후, 내부의 두 사람이 살아남기 위해 필연적으로 서로를 제거해야만 한다는 뜻이었다. 산소가 부족해지기 시작하면, 누군가 한 명은 죽어야만 다른 한 명이 숨을 쉴 수 있는 잔혹한 제로섬 게임이 시작될 것이었다.
"자, 이제 작별 인사라도 나누세요."
예린은 차갑게 중얼거리며 사출 레버를 당겼다. 콰광, 하는 굉음과 함께 캡슐의 해치가 완전히 밀폐되었고, 강력한 추진체가 점화되었다. 피투성이가 된 채 서로를 증오하며 헐떡이던 카이로스와 세레나는 갑작스러운 가속도에 몸이 뒤로 쏠리며 비명을 질렀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그리고 내부의 생명 유지 장치가 어떻게 변경되었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우주의 어둠 속으로 빠르게 튕겨 나갔다.
모니터 화면 속에서 캡슐이 작은 점이 되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며, 예린은 비로소 깊은 숨을 내뱉었다. 이제 캡슐 안의 두 사람은 서로를 죽여야만 살 수 있는 극한의 상황에 놓였다. 설령 누군가 살아남는다 해도, 그가 마주할 것은 황폐해진 우주의 공허함뿐일 것이다. 예린은 제어실의 전원을 하나씩 끄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주구의 붕괴가 임박했다는 경고음이 울려 퍼졌지만, 그녀는 더 이상 서두르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만이 쥔 진정한 탈출 열쇠를 매만지며, 붉게 타오르는 오리온의 잔해를 뒤로하고 자신의 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예린은 복도를 가로질러 지구행 마지막 셔틀의 탑승구로 향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거주구의 외벽이 비명을 지르듯 삐걱거렸고, 천장에서는 정체 모를 파편들이 비처럼 쏟아졌다. 그녀의 손에는 셔틀의 유일한 제어권이 담긴 데이터 칩이 꽉 쥐어져 있었다. 카이로스와 세레나, 두 권력자를 우주 저편으로 밀어낸 대가는 달콤했으나 그만큼 무거웠다. 탑승구 앞에 도착했을 때,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함께 도망치기로 약속했던 유일한 동료, 민우였다. 그는 초조한 얼굴로 시계를 확인하며 예린을 반겼다. 민우는 예린이 가져온 제어 칩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은 서둘러 셔틀의 해치를 닫고 내부로 진입했다. 폐쇄된 문 너머로 거주구의 붕괴가 가속화되는 굉음이 들려왔지만, 셔틀 내부만큼은 기묘할 정도로 정적이 감돌았다. 예린은 제어 콘솔에 칩을 삽입하며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안도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셔틀의 엔진이 점화되려는 찰나, 경고등이 붉게 점멸하며 날카로운 알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어 패널에는 '산소 공급 시스템 치명적 오류'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예린은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그녀가 캡슐을 강제 사출하고 시스템을 장악하기 위해 사용했던 '코어 강제 과부하 코드'의 부작용이었다. 과부하 코드는 단순히 기계적 장치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거주구 전체의 에너지 분배 체계를 뒤흔들어 놓았다. 그 여파로 셔틀과 연결된 거주구의 산소 공급망이 예정보다 훨씬 빠르게 붕괴되었고, 셔틀 내부의 예비 산소 탱크마저 과전류로 인해 파손된 상태였다. 현재 남은 산소량으로는 단 한 명만이 지구에 도착할 때까지 생존할 수 있었다.
민우의 호흡이 점차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패널을 살폈지만, 이미 제어 불능 상태에 빠진 시스템은 냉정하게 남은 산소 수치를 깎아 내려갔다. 민우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예린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공포보다도 믿기지 않는다는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예린은 떨리는 손으로 산소 조절 밸브를 조작하려 했지만, 밸브는 이미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았다. 누군가 한 명이 산소 마스크를 독점해야만 다른 한 명이 살 수 있는 구조였다. 민우는 헐떡이는 숨을 몰아쉬며 예린의 손을 잡으려 했으나, 예린은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생존이라는 강박적인 본능이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카이로스와 세레나를 배신했을 때 느꼈던 그 서늘한 계산기가 다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민우의 얼굴이 빠르게 창백해졌다. 그는 산소가 부족해지자 본능적으로 허공을 긁으며 괴로워했다. "예린... 어떻게... 이걸..." 그가 간신히 내뱉은 말은 질문이었으나, 예린에게는 질책처럼 들렸다. 그는 예린이 시스템을 조작했다는 사실을 직감한 듯했다. 민우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예린의 옷자락을 붙잡았지만, 예린은 그 손길을 뿌리치지 못한 채 멍하니 그를 내려다보았다. 민우의 눈동자에서 생기가 서서히 사라져 갔다. 그는 결국 쇳소리 섞인 마지막 숨을 토해내고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셔틀 내부에는 오직 예린의 거친 숨소리와 기계적인 경고음만이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그녀는 자신의 손끝에 닿았던 민우의 온기가 빠르게 식어가는 것을 느끼며, 그가 죽어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지켜보아야만 했다.
셔틀은 마침내 거주구를 이탈해 암흑의 우주 공간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가속도가 붙으며 몸이 시트로 깊숙이 파묻혔지만, 예린은 아무런 해방감도 느끼지 못했다. 그녀의 곁에는 이제 차갑게 식어버린 동료의 시신만이 남겨져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셔틀의 관측창 밖을 응시했다. 멀리서 오리온 거주구가 거대한 불꽃을 일으키며 산산조각 나고 있었다. 그 화려한 파멸 속에는 그녀가 밀어 넣은 카이로스와 세레나, 그리고 그녀를 믿었던 민우의 흔적이 섞여 있을 것이었다. 살아남았다는 안도감보다 더 큰 것은, 누군가의 희생을 딛고 올라섰다는 지독한 부채감이었다.
예린은 산소 마스크를 통해 들어오는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셨다. 폐부 깊숙이 들어오는 산소는 달콤했으나, 그것은 동시에 그녀가 저지른 선택의 결과물이었다. 그녀는 이제 지구로 향하고 있었지만, 그곳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승리의 영광이 아니라 지울 수 없는 죄책감의 낙인이었다. 셔틀 내부의 정적은 마치 거대한 무덤처럼 그녀를 압도했다. 예린은 무릎을 끌어안은 채, 끝없이 펼쳐진 검은 우주를 바라보았다. 별들은 차갑게 빛나고 있었고, 그 정막한 공간 속에서 그녀는 자신이 얻은 생존이 얼마나 고독하고 무거운 것인지 깨달았다. 그녀는 살아남았으나, 영혼의 일부는 그 무너지는 거주구와 함께 우주의 먼지가 되어 사라진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