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

침묵의 증언대

작성일 2026-10-16 · 10,199자 · 약 21분 (분당 500자 기준)

임상시험 조작 누명을 쓴 도망자 고리안이 자신을 매장한 이들의 위험한 제안을 받고 증인석에 선다.

발행: TaleNa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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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팡이 냄새가 찌든 지하 단칸방의 공기는 무겁고 끈적였다. 고리안은 낡은 테이블 위에 놓인 태블릿 PC의 화면을 응시했다. 발신인 불명의 메일, 하지만 내용은 명백히 박준형 판사와 바이오젠의 CEO 최성욱이 보낸 것이었다. '협조한다면 모든 혐의를 벗겨주고 자유를 보장하겠다.'라는 문장은 간결했으나 그 속에 담긴 오만함은 읽어낼 수 있었다. 그들은 고리안이 막다른 길에 몰려 절박하게 구원을 바라고 있을 것이라 확신했을 것이다. 임상시험 조작이라는 누명을 쓰고 도망자가 된 지 수개월, 고리안은 사회적으로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최성욱은 그를 완벽하게 매장하기 위해 모든 언론과 사법 체계를 이용했고, 박준형은 그 판결문에 도장을 찍어줄 준비가 된 인물이었다.

고리안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자유라는 달콤한 미끼.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자유란 아마도 그들이 설계한 시나리오대로 입을 열고, 조작된 증거에 고개를 끄덕인 뒤, 조용히 사라져 주는 '순종적인 자유'를 의미할 것이다. 만약 그들의 기대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들은 망설임 없이 그를 다시 수갑 채워 지하 감옥으로 처넣거나, 혹은 영원히 입을 다물게 만들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리안은 이 제안을 무시할 수 없었다. 은신처의 식량은 바닥나고 있었고,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이름 뒤에 붙은 '조작범'이라는 꼬리표를 떼어내고 싶었다. 그것은 정의감이라기보다, 자신의 완벽했던 연구 결과가 쓰레기 취급받는 것에 대한 지독한 결벽증에 가까웠다.

그는 책상 위에 흩어진 서류들을 정리하며 머릿속으로 가상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최성욱이 설계한 판은 정교했다. 고리안이 증인석에 서는 순간, 그는 이미 짜인 각본의 배우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고리안은 단순히 배우로 출연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이 위험한 도박에 응하기로 결정했다. 함정인 것을 알면서도 뛰어드는 이유는 단순했다. 적의 심장부로 들어가지 않고서는 판을 뒤집을 결정적인 한 방을 날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메일에 짧은 수락의 답장을 보냈다.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다만, 조건은 공정한 증언 기회다.'라는 문구는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최성욱과 박준형은 이를 그가 겁을 먹고 항복한 것으로 해석했을 것이다. 그들의 자만심은 고리안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었다.

준비를 마친 고리안은 낡은 코트를 걸치고 방을 나섰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초췌했지만, 눈빛만은 날카롭게 살아 있었다. 그는 가슴 안쪽 주머니에 작은 USB 메모리 하나를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것은 그가 도망치기 직전 목숨을 걸고 빼낸, 바이오젠의 진짜 데이터 로그였다. 물론 지금 당장 그것을 꺼내 보인다고 해서 세상이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법정의 모든 권한은 박준형의 손에 있었고, 증거의 채택 여부는 그가 결정한다. 하지만 공개 재판이라는 형식은 양날의 검이었다. 수많은 카메라와 방청객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가 완전히 매장당하는 모습은 최성욱에게 승리감을 주겠지만, 동시에 예상치 못한 변수가 터져 나왔을 때의 파급력 또한 극대화될 터였다.

약속된 장소인 법원 후문으로 향하는 길, 고리안은 주변을 끊임없이 경계했다. 검은색 세단 한 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 문이 열리고,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수행원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안내했다. 차 안에는 최성욱이 앉아 있었다. 그는 여전히 승리자의 미소를 지으며 고리안을 훑어보았다. "결국 돌아왔군, 고 박사. 현명한 선택이야. 자네가 우리가 원하는 대로만 말해준다면, 내일 아침이면 자네는 다시 존경받는 연구원으로 복귀할 수 있을 걸세." 최성욱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는 상대를 완전히 장악했다는 확신이 서려 있었다. 고리안은 그 미소를 마주하며 냉소적으로 답했다. "존경보다는 생존에 관심이 많아서 말이죠."

최성욱은 고리안의 냉소에 아랑곳하지 않고 덧붙였다. "박 판사님께서도 자네의 협조를 기다리고 계시네. 너무 튀는 행동은 하지 말게. 이건 자네를 구제하기 위한 마지막 배려니까." 배려라는 단어가 가당치 않게 들렸지만, 고리안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최성욱이 자신을 단순한 '패배자'로 정의 내리는 순간, 주도권이 미세하게 자신에게로 이동하는 것을 느꼈다. 상대가 나를 과소평가할 때가 가장 공격하기 좋은 타이밍이다. 차는 법원 내부의 비밀 통로를 통해 재판정으로 연결된 대기실에 멈춰 섰다. 이제 되돌아갈 길은 없었다. 문 너머에는 그를 무너뜨리기 위해 정교하게 짜인 함정과, 그 함정을 깨부술 유일한 기회가 공존하고 있었다.

무거운 법정의 문이 열리고, 고리안은 수많은 사람의 시선이 쏟아지는 가운데 증인석으로 걸어 들어갔다. 방청석의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밀려왔고, 카메라 플래시가 연신 터져 나왔다. 법대 위에 앉아 있는 박준형 판사는 엄격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박준형의 눈빛에는 자비심 따위는 없었다. 오직 계획대로 상황이 흘러가고 있는지 확인하려는 감시자의 시선뿐이었다. 고리안은 증인석에 앉아 차가운 나무의 질감을 손끝으로 느꼈다. 주변의 공기는 압도적이었고, 자신을 향한 적대감과 호기심이 뒤섞인 분위기가 피부에 닿았다.

최성욱은 방청석 앞줄에 앉아 여유롭게 다리를 꼬고 있었다. 그는 마치 연극의 관객처럼, 자신이 연출한 비극의 주인공이 무대 위로 올라오는 것을 감상하고 있었다. 고리안은 천천히 숨을 고르며 정면을 응시했다. 이곳은 더 이상 단순한 법정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는 권력을 공고히 할 제단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생존을 건 전쟁터였다. 박준형 판사가 의사봉을 두드리며 재판의 시작을 알렸다. 고리안은 자신을 옭아매려는 보이지 않는 사슬들을 느끼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이제 그가 입을 여는 순간, 조작된 진실과 진짜 거짓의 치열한 싸움이 시작될 것이었다. 고리안은 자신을 매장하려는 이들이 설계한 완벽한 함정의 한가운데, 가장 위험하고도 확실한 위치인 증인석에 완전히 안착했다.

박준형 판사의 서늘한 음성이 정적을 깼다. 그는 이미 판결문을 작성해 둔 심판자처럼 오만한 태도로 고리안을 내려다보았다. 그 옆에 앉은 최성욱 CEO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턱을 괸 채, 마치 잘 짜인 연극을 관람하는 관객처럼 고리안의 반응을 살폈다. 최성욱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증거물 제1호를 제시했다. 대형 스크린에 투사된 것은 고리안의 서명이 선명하게 찍힌 내부 자금 횡령 내역서와 피해자 명단이었다. 방청석에서 즉각적으로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고리안은 화면 속 서류를 응시했다. 분노보다는 분석이 앞섰다. 위조된 서명의 획 끝부분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기계로 정교하게 복제한 뒤 사람이 수작업으로 덧칠한 흔적이었다. 상대는 치밀했지만, 완벽하지는 않았다.

"이 문서에 적힌 금액만 수십억입니다. 고리안 씨, 당신이 연구비를 빼돌려 호화 생활을 누리는 동안 임상시험 대상자들은 고통 속에서 죽어갔습니다. 인정하시겠습니까?" 최성욱의 목소리에는 가증스러운 연민이 섞여 있었다. 고리안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그를 응시했다. 박준형 판사는 최성욱의 유도 심문에 맞장구를 치듯 고리안을 압박했다. "증인은 횡령뿐만 아니라 부작용을 은폐하기 위해 데이터를 조작하고, 이를 지적한 동료를 협박했다는 정황이 있습니다. 사실입니까?" 쏟아지는 거짓 증언과 조작된 서류들은 고리안을 순식간에 파렴치한 살인범이자 도둑으로 몰아세웠다. 법정의 공기는 빠르게 차가워졌고, 그를 향한 시선은 경멸과 혐오로 가득 찼다. 그는 철저하게 고립되고 있었다. 하지만 고리안은 이 압박감조차 계산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적들이 확신에 찼을 때가 가장 취약한 법이었다.

최성욱은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한 듯 결정타를 날리기 위해 다음 증거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고리안이 누군가와 은밀하게 주고받았다는 가짜 이메일 기록이었다. 이메일 속의 고리안은 냉혈한처럼 굴며 피해자들의 상태를 '폐기물'이라 칭하고 있었다. 방청석의 유가족 중 한 명이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고, 법정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박준형 판사가 의사봉을 두드려 장내를 정돈했지만, 이미 분위기는 고리안의 유죄를 확정 짓고 있었다. 고리안은 소란스러운 주변 상황 속에서도 시선을 돌려 법정 한구석에 위치한 기록 담당 직원을 보았다. 그는 미리 포섭해둔 내부 조력자였다. 조력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고리안과 짧게 눈이 마주치자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는 끝났다는 신호였다.

고리안은 손목시계를 슬쩍 확인했다. 그는 지금 당장 소리를 높여 반박하지 않았다. 어설픈 부인은 오히려 조작된 증거들의 신빙성을 높여줄 뿐이었다. 그는 상대가 스스로의 오만에 취해 더 많은 패를 까놓기를 기다렸다. 최성욱은 고리안의 침묵을 패배의 신호로 해석했다. 그는 더욱 기세등등하게 고리안의 '범죄 행각'을 읊어 내려갔다. "보십시오. 이 사람은 이제 변명할 기운조차 없는 모양입니다. 진실은 이미 서류에 다 나와 있습니다." 최성욱의 목소리가 법정에 울려 퍼질수록, 고리안의 머릿속에서는 정밀한 시뮬레이션이 돌아가고 있었다. 상대의 허점은 바로 그 '완벽함'에 있었다. 너무나 완벽하게 조작된 증거들은 실제 데이터와의 괴리를 극명하게 드러낼 준비가 되어 있었고, 고리안은 그 트리거를 당길 적절한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기록 담당 직원이 조심스럽게 콘솔의 버튼을 눌렀다. 겉으로는 재판 기록을 백업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고리안이 미리 심어둔 데이터 송출 프로그램의 대기 상태를 활성화하는 작업이었다. 고리안은 최성욱의 조롱 섞인 질문이 이어지는 찰나, 아주 낮고 서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서류들이 정말 '완벽'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갑작스러운 발언에 최성욱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박준형 판사는 불쾌한 표정으로 "증인은 질문에만 답하세요"라고 윽박질렀지만, 고리안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스크린에 띄워진 조작된 이메일을 가리키며, 조력자에게 최종 송출 준비를 마쳤다는 눈신호를 보냈다.

이제 모든 준비는 완료되었다. 다만 그는 여기서 바로 진실을 터뜨리지 않았다. 지금 당장의 반전보다는, 상대가 완전히 승리를 확신하고 방심한 순간에 가장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는 것이 효율적이었다. 그는 기록 담당 직원이 전송 대기 중인 데이터 패킷의 상태를 최종 확인하는 것을 보았다. 최성욱과 박준형은 고리안이 그저 발악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비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고리안은 그들의 비웃음을 차갑게 응시하며 생각했다. 이 폐쇄된 법정에서 조작된 증거들이 쏟아질수록, 나중에 드러날 진실의 파괴력은 더 커질 것이라고. 그는 자신을 포위하고 있는 적들의 살기를 느끼며, 다가올 파멸의 시간을 기다리며 희미하게 웃었다. 이제 남은 것은 최적의 순간에 전송 버튼을 누르는 것뿐이었다. 고리안은 절망적인 고립 속에서 역설적으로 완전한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최성욱이 다음 조작 증거를 제시하기 위해 서류 뭉치를 집어 드는 순간, 고리안의 시선은 다시 한번 기록 담당 직원에게 고정되었다. 데이터는 이미 서버의 입구까지 도달해 있었고, 송출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작된 거짓이 법정을 가득 채운 지금, 그는 이 모든 가짜 세계를 무너뜨릴 준비를 마친 채 침묵의 증언대에 서 있었다.

최성욱은 승리를 확신한 포식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증인석에 선 고리안을 가련하다는 듯 쳐다보며, 품 안에서 마지막 결정타가 될 서류 한 장을 천천히 꺼내 들었다. 법정 내의 공기는 이미 최성욱의 손아귀에 있었다. 배심원들의 눈초리에는 경멸이 서려 있었고, 방청객들은 수군거리며 고리안의 몰락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최성욱은 일부러 시간을 끌며 서류를 정돈했고, 그 정적이 고리안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 것이라 믿었다.

“고리안 씨, 당신이 주장하는 ‘진실’이라는 것이 고작 이런 탐욕의 결과였습니까?”

최성욱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서류를 높이 쳐들었다. 그것은 고리안이 해외 유령 계좌로 거액의 자금을 빼돌렸다는 조작된 송금 내역서였다. 최성욱은 이제 확신에 찬 목소리로 법정을 향해 외쳤다. 그는 고리안이 단순한 과실범이 아니라, 회사의 미래를 팔아치운 파렴치한 배신자라는 프레임을 완벽하게 씌우려 했다. 최성욱의 목소리가 고조될수록 고리안은 오히려 차분해졌다. 그는 최성욱의 오만이 정점에 달해, 스스로가 만든 거짓말의 무게에 짓눌리기 직전의 그 찰나를 기다렸다.

마침내 최성욱이 “이 증거만으로도 당신의 모든 변명은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것”이라며 비웃음 섞인 일갈을 내뱉은 순간, 고리안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미리 약속된 신호였다. 고리안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긴장한 표정으로 콘솔을 조작하던 기록 담당 직원이 있었다. 직원의 손가락이 엔터 키를 강하게 눌렀고, 정적을 깨는 기계음이 법정 내에 울려 퍼졌다. 고리안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순식간에 법정 내의 모든 모니터가 점멸했다. 최성욱이 제시한 조작된 내역서가 띄워져 있던 화면이 갑자기 노이즈와 함께 지워지더니, 그 자리에 전혀 다른 문서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최성욱이 그토록 숨기려 했던 원본 데이터였다. 조작 전의 실제 송금 경로, 임상시험 결과가 수정된 로그 기록, 그리고 최성욱이 실무자들에게 조작을 지시하며 보낸 은밀한 이메일들이 실시간으로 스크롤 되며 화면을 가득 채웠다.

“이게… 이게 무슨 일이야! 당장 꺼!”

최성욱의 얼굴에서 여유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당황해하며 소리를 질렀지만, 이미 데이터는 법정 내 모든 스크린에 박제되어 있었다. 배심원들은 눈앞에 펼쳐진 극명한 대조에 경악했다. 방금 전까지 최성욱이 ‘결정적 증거’라고 주장했던 서류가 어떻게 변조되었는지, 원본과 대조된 붉은색 표식들이 그들의 눈을 자극했다. 최성욱의 위선이 낱낱이 파헤쳐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허둥지둥 모니터 앞으로 다가갔지만, 디지털의 속도는 그의 당혹감을 앞질러 갔다.

방청석에서는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바이오젠의 깨끗한 이미지와 최성욱의 고결한 척하던 모습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고리안은 여전히 증인석에 정지한 채, 무너져 내리는 최성욱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이 겪은 고립의 시간을 최성욱에게 그대로 돌려주고 있었다. 이제 법정의 주인공은 더 이상 권력을 쥔 CEO가 아니라, 진실을 쥔 도망자였다. 고리안은 이 압도적인 반전이 주는 쾌감을 냉소적으로 음미하며, 다음 단계의 파멸을 준비하는 최성욱의 떨리는 손끝을 지켜보았다.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자, 재판장석에 앉아 있던 박준형 판사의 안색이 급격히 변했다. 그는 최성욱과 사전에 합의한 시나리오가 완전히 붕괴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박준형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의사봉을 거칠게 두드렸다. 법정 내의 소란을 잠재우고 이 불리한 상황을 강제로 끊어내려는 시도였다.

“정숙하세요! 지금 송출되는 자료는 공식적인 증거 채택 절차를 거치지 않은 불법적인 자료입니다! 즉시 송출을 중단하십시오!”

박준형은 고함을 쳤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더 이상 권위가 없었다. 이미 방청객들은 스마트폰을 꺼내 모니터의 내용을 촬영하고 있었고, 배심원들은 박준형의 지시보다는 화면 속의 명백한 조작 흔적에 더 집중하고 있었다. 조작 사실은 이미 빛의 속도로 법정 밖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박준형은 최성욱과 짧게 시선을 교환했다. 두 사람의 눈에는 공포와 당혹감이 교차했다. 그들은 이 재판을 통해 고리안을 매장하려 했으나, 도리어 자신들이 판 무덤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재판을 잠시 정회하겠습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십시오!”

박준형이 다급하게 재판 종료를 선언하며 의사봉을 내리쳤지만, 이미 분위기는 반전된 뒤였다. 배심원석에서는 누군가 낮은 목소리로 “이게 진짜라면 우리가 속은 거 아닌가?”라는 의문을 제기했고, 그 작은 불씨는 순식간에 거대한 불길이 되어 법정을 휩쓸었다. 고리안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의구심 섞인 시선들이 경외와 미안함으로 바뀌는 것을 느꼈다. 그는 강제 종료를 외치는 박준형의 절박한 외침을 뒤로한 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최성욱의 무너진 자존심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법정의 소란은 이미 박준형 판사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 있었다. 배심원들의 수군거림은 확신에 찬 외침으로 변했고, 방청석에서는 최성욱의 이름을 비난하는 야유가 터져 나왔다. 최성욱은 창백해진 얼굴로 모니터를 응시하며 떨리는 입술을 뗐다. 그는 여전히 이것이 단순한 전산 오류이거나 고리안의 조작이라고 주장하고 싶었지만,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는 바이오젠 내부의 보안 서명까지 완벽하게 포함된 원본이었다. 박준형 판사는 의사봉을 거칠게 내리치며 정숙을 요구했지만, 그의 권위는 이미 바닥에 떨어진 상태였다. 고리안은 그 아수라장 속에서 홀로 정적에 잠긴 채 최성욱의 몰락을 감상했다. 그는 승리를 확신했다. 조작된 증거가 거짓임이 드러난 이상, 법정은 고리안의 무죄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고리안의 목적은 단순한 무죄 판결이 아니었다. 그는 최성욱이라는 거대한 성벽을 완전히 무너뜨리기 위해 마지막 쐐기를 박기로 했다. 그는 천천히 마이크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눈빛은 차가웠고, 목소리는 기계처럼 건조했다. 고리안은 최성욱이 그토록 숨기고 싶어 했던 임상시험의 결정적 결함, 그리고 그 결함을 덮기 위해 누가 어떤 실수를 저질렀는지를 낱낱이 읊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증거 제시가 아니라, 정교하게 설계된 처형식이었다. 고리안은 최성욱의 지시를 충실히 따랐던 동료 연구원 김 박사의 이름을 거론하며, 그가 데이터 입력 과정에서 저지른 치명적인 오차와 이를 은폐하려 했던 정황을 구체적으로 폭로했다. 김 박사는 이 재판의 증인석 뒤편에서 떨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실수가 최성욱의 강압에 의한 것이었음을 호소하려 했지만, 고리안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김 박사를 단순한 피해자가 아닌, 공범이자 무능한 책임자로 몰아세우고 있었다.

김 박사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리안을 바라보았다. 함께 밤을 지새우며 연구했던 동료이자, 자신이 끝까지 믿어주었던 후배였다. 그러나 고리안의 증언은 냉혹했다. 그는 김 박사의 실수를 세밀하게 분석하여 그것이 단순한 착오가 아니라 연구원으로서의 기본 자격 미달에서 비롯된 치명적 결함임을 강조했다. 법정 내의 시선이 최성욱에서 김 박사로 옮겨갔다. 최성욱은 자신의 치부를 함께 짊어질 희생양을 찾은 듯 비열한 미소를 지었지만, 고리안은 그 미소조차 불쾌했다. 고리안은 김 박사가 겪게 될 사회적 매장과 법적 책임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결백을 완벽하게 증명하고, 상대의 모든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 모든 혼란의 시작은 원본 데이터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김 박사의 태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최 CEO의 조작은 그 빈틈을 이용한 것뿐이죠."

고리안의 말 한마디에 김 박사는 무너져 내렸다. 그는 자리에 주저앉아 신음 섞인 숨을 내뱉었다. 이제 그는 단순한 회사의 직원이 아니라, 수많은 환자의 생명을 위협한 오보의 주범으로 낙인찍혔다. 최성욱의 몰락과 동시에 김 박사의 인생 역시 파멸의 구렁텅이로 떨어졌다. 박준형 판사는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서둘러 최종 판결을 내렸다. 고리안에게 씌워졌던 모든 혐의는 기각되었고, 증거 조작의 책임이 있는 최성욱과 관련자들에게 엄중한 법적 책임을 묻는다는 판결문이 낭독되었다. 법정은 환호성으로 가득 찼고, 사람들은 정의가 승리했다며 박수를 보냈다.

무죄 판결이 확정된 순간, 고리안은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었다. 하지만 가슴 속에서 느껴지는 것은 해방감이 아니라 묵직한 불쾌감이었다. 그는 법정을 나서며 뒤를 돌아보았다. 최성욱은 경호원들에게 끌려 나가며 분노 섞인 고함을 지르고 있었고, 김 박사는 멍한 눈으로 바닥만을 응시한 채 누군가의 부축을 받아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았다. 누군가를 짓밟고 올라서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냉혹한 논리, 승리를 위해서라면 동료의 희생쯤은 당연하게 여기는 효율 중심의 사고방식. 그것은 고리안이 그토록 경멸했던 최성욱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는 자신이 최성욱이라는 괴물과 싸워 이겼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그 과정에서 자신 또한 그와 닮은 괴물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정의를 구현했다는 명분 아래 행한 냉정한 계산과 배신이 그를 짓눌렀다. 고리안은 외투 깃을 세우며 법정 밖의 차가운 공기 속으로 걸어 나갔다.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와 기자들의 질문이 그를 에워쌌지만,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법적으로는 완벽한 자유를 얻었으나, 마음속에는 지워지지 않는 씁쓸한 자기혐오가 자리 잡았다. 승리의 대가는 생각보다 가혹했다. 그는 군중 속으로 사라지며, 자신이 버린 동료의 절망적인 얼굴을 떠올렸다. 그것은 그가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무죄 판결문보다 무거운 유죄의 낙인이었다. 고리안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법정의 육중한 문을 완전히 닫았다. 그렇게 그는 홀로 남겨진 승자가 되어 법정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