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온은 사무실 구석의 낡은 모니터 앞에 앉아 마른세수를 했다. 화면 속에는 실시간 투표 현황이 숫자의 나열로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스타더스트 기획사의 생존이 걸린 서바이벌 프로그램, 그리고 자신의 빚더미를 청산해 줄 유일한 탈출구. 다온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관리자 계정에 접속했다. 보안 등급이 낮은 구형 서버의 허점을 파고드는 것은 전직 프로듀서였던 그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우승 후보로 점찍어둔 연습생의 득표수를 정교하게 올리기 시작했다. 단순히 숫자를 더하는 무식한 방법이 아니었다. 유령 계정을 생성해 투표 분산을 막고, 특정 시간대에 표가 몰리게 만들어 마치 자연스러운 팬덤의 화력인 것처럼 위장하는 정밀한 작업이었다.
숫자가 올라갈수록 다온의 심장 박동도 빨라졌다. 이 조작이 성공해 자신이 선택한 '상품'이 우승한다면, 비밀 계약에 따라 보장된 상금과 지분이 그의 손에 들어올 것이다. 그러면 매달 독촉 전화를 걸어오던 사채업자들의 횡포에서 벗어나 다시금 업계의 중심부로 진입할 수 있다. 그는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 그래프의 곡선을 매끄럽게 다듬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누군가에게는 꿈과 희망이 걸린 서바이벌이었지만, 다온에게 이것은 단지 생존을 위한 산술적인 게임에 불과했다. 그는 자신의 선택이 가져올 도덕적 결함보다는, 당장 내일 닥쳐올 파산의 공포가 훨씬 더 구체적이고 치명적이라고 믿었다.
작업에 몰두하던 다온의 등 뒤로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 인기척도 없이 다가온 그림자가 그의 모니터를 가로막았다. 고개를 돌리자, 맞춤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강진혁 이사가 무심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진혁은 팔짱을 낀 채 다온이 조작하고 있던 화면을 가만히 응시했다. 다온은 황급히 창을 닫으려 했지만, 진혁의 낮은 목소리가 먼저 그의 움직임을 멈춰 세웠다.
"숫자가 참 예쁘게 올라가더군, 임 매니저. 마치 누군가 정성스럽게 가꾼 정원처럼 말이야."
다온은 침을 삼키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그냥... 팬들의 반응이 예상보다 뜨거운 것 같습니다. 요즘 화제성이 좋아서요."
진혁은 대답 대신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천천히 다온의 책상 위로 몸을 숙였다. 은은한 향수 냄새와 함께 압도적인 위압감이 다온을 짓눌렀다. 진혁의 눈은 다온의 눈동자 너머, 그가 숨기려 했던 불안과 탐욕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진혁은 손가락으로 모니터의 특정 지점을 툭툭 쳤다. 그곳은 다온이 방금 전 투표 가중치를 조정한 데이터 값들이 머물던 자리였다. 다온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단순한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진혁의 시선이 너무나 구체적이었다.
"화제성이라. 데이터라는 건 거짓말을 하지 않지. 다만 거짓말을 하는 사람을 찾아내는 게 재밌을 뿐이야. 자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진혁의 말투는 정중했지만, 그 속에 담긴 내용은 날카로운 칼날 같았다. 다온은 자신이 구축한 정교한 성벽에 이미 커다란 균열이 가 있음을 직감했다.
다온은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쓰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저 매니저로서 연습생들을 지원했을 뿐입니다."
진혁은 다온의 부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무실을 천천히 거닐었다. 구두 굽이 바닥에 부딪히는 규칙적인 소리가 다온의 신경을 긁었다. 진혁은 벽에 걸린 서바이벌 대진표 앞에서 멈춰 서더니, 다온이 밀어주고 있는 연습생의 사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욕심은 누구나 갖지. 특히 벼랑 끝에 몰린 사람은 더더욱. 빚이라는 게 참 무서운 게, 사람을 효율적인 기계로 만들거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아주 유능한 기계 말이야."
진혁의 말은 단순한 추측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온의 현재 상황과 심리적 상태를 정확히 타격하는 정밀 샷이었다. 다온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진혁이 자신의 채무 상태를 알고 있다는 사실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가 이 조작의 정황을 단순한 의심이 아니라 확신으로 잡고 있다는 점이었다. 진혁은 다시 다온을 향해 돌아섰다.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온기라고는 전혀 없는, 포식자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임 매니저, 자네가 공들여 쌓아 올린 이 가짜 성이 무너질 때 어떤 소리가 날지 궁금하지 않나? 아마 아주 처참할 거야. 특히 그 우승자가 믿고 있는 '정당한 승리'라는 환상이 깨지는 순간 말이지."
다온은 강진혁의 압박에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는 진혁이 단순히 조작을 잡아낸 것을 넘어, 이를 이용해 자신을 어떻게 요리하려 하는지 가늠하려 했다. 진혁은 다온의 당혹감을 즐기듯 잠시 침묵을 유지하다가, 책상 위에 놓인 다온의 스마트폰을 힐끗 보았다. 아마도 사채업자들의 독촉 문자가 와 있을 시간임을 상기시키는 몸짓이었다.
"걱정 마. 지금 당장 자네를 해고하거나 공론화할 생각은 없으니까. 게임은 끝까지 가야 재미있는 법이지. 다만, 자네가 선택한 그 '상품'이 과연 끝까지 상품 가치를 유지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겠어."
진혁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채 사무실 문을 향해 걸어갔다. 문손잡이를 잡은 그가 멈춰 서서 고개만 살짝 돌려 덧붙였다. "너무 과하게 올리지는 마. 너무 가파른 상승 곡선은 의심을 부르니까. 다음 보고 때까지는 좀 더 '자연스럽게' 움직여 보라고."
진혁이 나가고 난 뒤, 사무실에는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다온은 다시 모니터 앞에 앉았지만, 더 이상 숫자들이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설계한 정교한 조작의 덫이 사실은 강진혁이 쳐놓은 더 큰 그물 속에 들어있다는 공포가 그를 잠식했다. 그는 이제 단순한 조작자가 아니라, 감시당하는 죄수가 된 기분이었다. 다온은 떨리는 손으로 마우스를 잡았지만, 이제는 어떤 숫자를 입력해도 그것이 자신의 목을 조르는 올가미가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
강진혁이 던져놓은 위협은 단순한 경고가 아니었다. 다온은 진혁이 보낸 메일함 속의 첨부 파일을 열어보았다. 그곳에는 다온이 우승 후보로 낙점해 전폭적으로 밀어주고 있던 연습생, 서준의 과거 기록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단순한 연애사나 가벼운 말실수가 아니었다. 과거 소속사와의 갈등 과정에서 벌어진 폭행 시비와 정산 문제로 얽힌 지저분한 법적 공방, 그리고 결정적으로 대중이 혐오할 만한 성격적 결함이 드러난 녹취록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이 터지는 순간 서준의 이미지로 쌓아 올린 투표 데이터는 쓰레기 더미가 될 것이고, 그를 조작해 우승시키려 한 다온의 행위는 추악한 욕심으로 낙인찍혀 업계에서 영원히 매장될 터였다.
다온은 마른세수를 하며 서준의 대기실로 향했다. 복도를 걷는 내내 구두 굽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지만, 그의 머릿속은 오직 하나, 이 구멍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대기실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간 다온의 눈에 거울을 보며 미소 연습을 하던 서준이 들어왔다. 서준은 다온을 보자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자신을 믿어주는 유일한 어른이자 스승이라고 믿는 소년의 순진한 눈망울이 다온의 눈에는 이제 거추장스러운 짐처럼 보였다. 다온은 인사조차 받지 않은 채 서준의 앞에 태블릿 PC를 내밀었다. 화면에는 진혁이 확보한 서준의 치부들이 적나라하게 떠 있었다. 서준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것이 다 무슨 뜻이냐고 물었지만, 다온의 표정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이게 세상에 알려지면 네가 꿈꾸는 데뷔는커녕,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게 무너져. 아니, 무너지는 건 너뿐만이 아니지. 내 계획까지 전부 망가질 거야." 다온의 목소리에는 걱정보다 강박에 가까운 통제가 섞여 있었다. 그는 서준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며 낮게 읊조렸다. "지금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네 사생활, 인간관계, 심지어는 네가 내뱉는 말 한마디까지 전부 내 허락을 받아야 해. 알겠어?"
서준은 당혹감과 공포가 뒤섞인 얼굴로 다온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다온이 보여준 세심한 배려와 지지가 사실은 철저히 계산된 관리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다온은 서준의 스마트폰을 빼앗아 그 자리에서 전원을 껐다. 그리고는 그가 외부와 연락할 수 있는 모든 통로를 차단하기 시작했다. 가족과의 연락은 물론, 친한 동료 연습생들과의 교류조차 '이미지 관리'라는 명목하에 금지했다. 다온은 서준의 스케줄표를 빈틈없이 짜 넣었다. 연습 시간 외에는 오직 다온이 지정한 장소에서, 다온이 정해준 대본대로만 움직여야 했다.
"형,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그냥 조금 조심하면 될 텐데, 이렇게까지 가둬두는 건..." 서준이 울먹이며 항변했지만, 다온은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조금 조심한다고 해결될 수준이 아니야. 강진혁 이사는 네가 숨 쉬는 간격까지 계산해서 공격할 사람이야. 내가 널 보호하는 유일한 방법은 너를 완전히 통제하는 것뿐이야. 억울하면 우승해. 우승하고 나면 이 정도 구속은 아무것도 아니게 될 테니까." 다온의 말은 설득이라기보다 명령에 가까웠다. 그는 서준이 느끼는 정서적 결핍이나 불안함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에게 서준은 이제 함께 성장하는 제자가 아니라, 빚을 갚기 위해 반드시 지켜내야 할 고가의 상품에 불과했다.
서준은 다온의 손에 잡힌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신뢰의 상징이었던 다온의 손길이 이제는 자신을 옥죄는 쇠사슬처럼 느껴졌다. 그는 다온이 설계한 완벽한 동선과 이미지 속에 갇혀 서서히 질식해가는 기분을 느꼈다. 연습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더 이상 열정 넘치는 소년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정교하게 조각된 인형 같았다. 서준은 다온을 믿고 싶었지만, 그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이제 신뢰 대신 의구심과 배신감이 서리기 시작했다.
며칠 뒤, 서준의 태도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겉으로는 다온이 원하는 대로 완벽한 '우승 후보'의 모습을 연기했지만, 둘 사이의 공기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다온이 건네는 조언에 서준은 짧은 대답만 남겼고, 눈을 맞추는 일조차 피했다. 다온은 서준의 심리적 변화를 감지했지만, 그것을 다독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감정적인 동요가 퍼포먼스에 지장을 줄까 봐 더욱 강하게 그를 압박했다. "표정 관리해. 지금 네 얼굴에 '불행'이라고 쓰여 있어. 사람들이 그런 얼굴을 한 스타를 좋아할 것 같아?" 다온의 날카로운 지적에 서준은 입술을 깨물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통제가 심해질수록 조작의 흔적은 역설적으로 더 늘어났다. 서준의 사생활을 은폐하기 위해 다온은 관계자들에게 거짓 정보를 흘렸고, 일부의 입을 막기 위해 회사 공금을 유용해 뒷돈을 찔러주었다. 서준의 이미지를 세탁하기 위해 조작한 가짜 에피소드들이 SNS를 통해 퍼져 나갔지만, 그 거짓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더 큰 거짓말이 필요했다. 다온은 서준이라는 상품을 지키기 위해 거대한 거짓의 성벽을 쌓아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성벽이 높아질수록 그 안에 갇힌 서준의 증오는 깊어졌고, 성벽 밖에서 이를 지켜보는 강진혁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어느 날 밤, 다온은 서준의 방에서 몰래 숨겨둔 작은 수첩을 발견했다. 그곳에는 다온이 통제한 기간 동안 서준이 느낀 절망과 분노, 그리고 다온에 대한 불신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형은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내 가치를 사랑하는 거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다온은 기묘한 불쾌감을 느꼈다. 정곡을 찔렸다는 수치심과 동시에, 감히 상품이 생산자의 의도를 파악했다는 오만함이 교차했다. 다온은 수첩을 덮으며 차갑게 생각했다. 신뢰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서준이 우승하는 것이고, 그래야만 자신의 빚을 청산할 수 있었다. 그렇게 다온은 무너진 관계의 파편 위에 위태로운 우승의 탑을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데뷔 마감 시한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강진혁의 공세는 더 이상 은밀한 협박에 그치지 않았다. 다온의 휴대전화는 아침부터 쉴 새 없이 울려댔다. 발신인은 하나같이 다온이 필사적으로 외면해 온 채권자들이었다. 강진혁이 그들의 채권을 매수해 소유권을 가져갔거나, 혹은 막대한 이자를 대신 지급하며 그들을 자신의 충견으로 만들었음이 분명했다. 다온이 전화를 받을 때마다 돌아오는 것은 정중한 독촉이 아니라, 당장 돈을 갚지 않으면 길거리로 나앉게 만들겠다는 원색적인 위협과 모욕이었다. 강진혁은 다온의 경제적 숨통을 조이는 동시에 그를 심리적인 벼랑 끝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사무실 책상 위에 놓인 서류 뭉치와 쏟아지는 메시지들은 다온에게 하나의 사실만을 각인시켰다. 이제 남은 시간은 며칠뿐이며, 서준을 우승시켜 상금을 거머쥐지 못하면 그에게 남는 것은 완전한 파멸뿐이라는 사실이었다.
강진혁은 다온의 집무실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다온의 책상 위에 일부러 채권자들의 명단과 미납금 내역서가 적힌 서류를 툭 던졌다. "임 매니저, 표정이 왜 그래? 마치 세상이 끝난 사람처럼. 사실 세상이 끝난 건 맞지. 자네가 짊어진 빚이 이제 내 손안에 있거든." 다온은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지만, 강진혁은 그 모습조차 즐거운 듯 턱을 괴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서준이라는 아이, 참 아깝더군. 하지만 그 아이의 과거가 세상에 알려졌을 때 대중이 보일 반응은 더 흥미롭겠지. 조작된 우승 후보의 추락만큼 짜릿한 구경거리가 또 어디 있겠어?" 강진혁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내용은 다온의 심장을 도려내는 칼날과 같았다.
다온은 강진혁의 폭로를 막기 위해 더 극단적인 조작을 감행하기로 했다. 그는 서준의 과거 기록을 완전히 삭제하기 위해 회사의 데이터베이스 관리자와 접촉해 뒷돈을 건넸고, 서준의 인간관계에 얽힌 증언들을 조작해 유리한 방향으로 편집했다. 단순한 은폐를 넘어,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가짜 서사를 만들어 서준의 이미지 위에 덧씌우는 작업이었다. 다온은 밤을 새워 서준의 프로필을 수정하고, 그가 마치 고난을 극복한 성실한 청년인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가짜 인터뷰 자료를 생성했다. 조작의 규모가 커질수록 강진혁이 쥔 패를 무력화할 가능성은 높아졌지만, 그 대가로 다온이 짊어져야 할 도덕적 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서준의 실제 삶을 지우고 그 자리에 정교한 거짓말을 채워 넣을 때마다, 다온은 자신이 서준이라는 인간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잘 가공된 인형을 조립하고 있다는 혐오감에 휩싸였다.
하지만 조작의 흔적은 지우면 지울수록 다른 곳에서 덧나기 시작했다. 서준은 다온이 자신의 주변 인물들에게 접근해 입단속을 시키거나 거짓 진술을 강요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어느 날 연습실에서 마주친 서준의 눈빛은 예전의 동경이나 신뢰 대신, 깊은 경멸과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형이 하는 일이 다 나를 위해서라고 했죠? 그런데 왜 내 주변 사람들이 다 형의 말 한마디에 입을 닫는 거죠?" 서준의 낮은 목소리가 적막한 연습실에 울려 퍼졌다. 다온은 잠시 말을 잃었다가 이내 차갑게 대꾸했다. "그게 네가 우승하기 위해 치러야 할 비용이야. 사소한 진실보다 거대한 성공이 더 가치 있다는 걸 곧 알게 될 거다." 다온의 말은 서준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하는 최면과도 같았다.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 최종 데뷔 결정전이 임박했다. 강진혁은 이제 최후의 일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다온을 불러 마지막 거래를 제안했다. 서준의 약점을 터뜨리는 대신, 다른 유력 후보의 점수를 깎아내려 서준을 억지로 우승시키라는 제안이었다. 얼핏 들으면 다온이 원하는 결과였지만, 그것은 다온이 설계한 정교한 조작 시스템을 강진혁의 손아귀에 완전히 넘겨주라는 의미였다. 만약 다온이 이를 거부한다면, 강진혁은 서준의 과거뿐 아니라 다온이 저지른 데이터 조작 증거까지 모두 언론에 뿌리겠다고 협박했다. 다온은 이제 단순히 빚을 갚는 문제를 넘어, 자신의 커리어 전체를 걸고 도박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다온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초라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한때 천재 프로듀서라 칭송받으며 음악적 순수성을 논하던 그는 이제 없었다. 남은 것은 누군가의 인생을 난도질해 자신의 안위를 챙기려는 탐욕스러운 매니저뿐이었다. 우승이라는 목표는 여전히 눈앞에 있었지만, 그 왕관을 씌워줄 대상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누구를 희생시켜야 하는지에 대한 잔인한 선택지가 다온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서준을 지키기 위해 다른 연습생의 꿈을 짓밟을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파멸을 막기 위해 서준을 제물로 바칠 것인가. 강진혁의 압박이 극에 달한 순간, 다온은 비로소 깨달았다. 이 게임에서 승자는 단 한 명뿐이며, 그 승리를 위해 그는 기꺼이 괴물이 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다온은 떨리는 손으로 강진혁이 내민 계약서에 서명을 하기 위해 펜을 잡았다.
다온은 펜 끝을 종이에 짓눌렀다. 강진혁의 입가에 걸린 비열한 미소가 시야에 들어왔지만,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존심이 아니라 생존이었다. 다온은 결국 서명했다. 하지만 계약서의 도장을 찍는 순간, 그는 깨달았다. 단순히 서명만으로는 강진혁의 갈증을 채울 수 없으며, 자신의 입지를 완벽히 다지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완전히 파괴해야 한다는 사실을. 다온은 강진혁과 합의한 '폭로의 시나리오'를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모든 조작의 흔적을 지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 흔적을 누군가의 단독 범행으로 몰아넣는 것이었다. 다온의 머릿속에 가장 재능 있고 순수했던 연습생, 지후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후는 다온이 프로듀서로서 가졌던 마지막 양심과도 같은 존재였기에, 역설적으로 가장 완벽한 제물이 될 수 있었다.
며칠 뒤, 다온은 지후를 조용한 회의실로 불렀다. 지후는 아무것도 모른 채 해맑은 표정으로 다온을 바라보았다. 다온은 떨리는 목소리를 숨기며 지후에게 조작된 증거물들이 담긴 서류 뭉치를 내밀었다. "지후야, 네가 너무 의욕이 앞서서 저지른 실수들이 발견됐어. 하지만 내가 어떻게든 덮어줄게. 일단 이 내용이 사실인지 확인해 봐." 지후는 당황하며 서류를 훑었다. 자신이 한 적 없는 일들이 마치 정교한 계획하에 이루어진 것처럼 기록되어 있었다. 지후가 혼란스러운 눈으로 다온을 쳐다보았을 때, 다온은 냉정하게 쐐기를 박았다. "이게 공개되면 넌 업계에서 매장이야. 하지만 내 말만 믿고 따르면 최소한의 퇴로는 만들어줄 수 있어."
폭풍은 빠르게 몰아쳤다. 강진혁은 약속대로 다온의 채권자들을 잠재웠고, 동시에 준비된 '폭로'를 터뜨렸다. 하지만 화살은 다온이 아닌 지후를 향했다. 서바이벌의 공정성을 해친 주범으로 지후가 지목되었고, 다온은 오히려 이를 뒤늦게 발견해 수습하려 노력한 '책임감 있는 관리자'로 포장되었다. 지후는 결백을 주장했지만, 다온이 조작해 심어놓은 물증과 강진혁의 막강한 언론 플레이 앞에 그의 목소리는 소음으로 치부되었다. 결국 지후는 시청자들의 거센 비난 속에 최악의 평가를 받으며 탈락했다. 무대 위에서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숙인 지후의 모습이 화면 가득 잡혔을 때, 다온은 모니터 너머로 그를 바라보며 심장이 조이는 통증을 느꼈다. 그것은 죄책감이었으나, 동시에 안도감이었다.
강진혁과의 거래는 완벽하게 이행되었다. 다온은 그동안 자신을 옥죄던 막대한 빚을 모두 청산했다. 뿐만 아니라, 이번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결단력' 덕분에 기획사의 실권을 쥔 핵심 인물로 급부상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채권자들의 전화를 두려워하며 떨지 않아도 되었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회사를 움직일 수 있는 권력을 가졌다. 서준은 우승컵을 거머쥐었으나, 그 영광의 그림자에는 지후라는 희생양이 짓밟혀 있었다. 다온은 화려한 파티장 한가운데 서서 사람들의 찬사를 받았지만, 정작 자신의 내면은 갈가리 찢겨 나가는 기분이었다.
소동이 가라앉은 어느 늦은 밤, 다온은 불 꺼진 연습실을 찾았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값비싼 수트와 권위적인 표정으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생기를 잃은 채 죽어 있었다. 얼마 전, 지후가 연예계를 완전히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극심한 정신적 충격과 배신감으로 인해 공황장애를 겪게 된 지후는 더 이상 노래를 부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고 했다. 다온은 지후가 연습실 구석에 남겨두고 간 낡은 악보집을 발견했다. 그 속에는 다온과 함께 꿈꿨던 순수한 음악적 열정과 지후의 진심 어린 메모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다온은 그 악보집을 손에 쥔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경제적 자유와 기획사의 실권, 그리고 모두가 부러워하는 성공. 그는 갈구하던 모든 것을 얻었지만, 그 대가로 자신의 예술적 영혼과 인간성을 맞바꿨음을 깨달았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조작과 배신으로 쌓아 올린 모래성뿐이었다. 정적만이 흐르는 연습실에서 다온은 깨달았다. 자신이 쓴 계약서의 마지막 조항은 빚의 탕감이 아니라, 스스로를 영원히 가둘 고독의 감옥이었다는 것을. 그는 화려한 왕관을 쓴 채, 텅 빈 공간 속에 홀로 남겨져 지독한 공허함에 잠겼다. 더 이상 누구에게도 미안해할 자격조차 없는, 성공한 괴물이 된 자신의 모습이 거울 속에 서늘하게 비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