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유리 성의 마지막 증언

작성일 2026-10-19 · 10,094자 · 약 21분 (분당 500자 기준)

가문에서 버려진 원윤슬이 상속 지분을 미끼로 거짓 증언을 요구하는 이복오빠 서준우의 위험한 제안 앞에 선다.

발행: TaleNa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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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의 무거운 공기가 폐부를 짓눌렀다. 최종 심리를 앞둔 법정 복도는 정적과 소음이 기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원윤슬은 벽에 기대어 서서 자신의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가문에서 지워진 이름, 박탈당한 권리, 그리고 쫓겨나듯 떠나야 했던 그날의 기억들이 차가운 대리석 바닥처럼 그녀의 발밑을 훑고 지나갔다. 그때, 구두 굽 소리가 정적을 깼다. 피고인석에 앉아 있어야 할 서준우가 변호인단의 보호를 받으며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 속에 담긴 것은 오만함과 경멸이었다.

"표정이 너무 어둡군, 윤슬아. 마치 내일 세상이 끝날 사람처럼 말이야."

준우의 목소리는 매끄러웠지만 그 끝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돋아 있었다. 그는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듯 목소리를 낮추며 그녀의 곁으로 바짝 다가섰다. 윤슬은 고개를 들어 그를 응시했다. 이복오빠라는 이름의 가면을 쓴 약탈자.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가 가진 절박함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준우는 주머니에서 작은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 그녀의 가슴팍에 가볍게 툭 쳤다. 그것은 단순한 종이 뭉치가 아니라, 그녀가 그토록 갈망하던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티켓이었다.

"네가 증인석에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입을 열어준다면, 이 안에 든 지분 양도서에 도장을 찍어주지. 네가 잃어버린 상속 지분의 일부다. 물론, 내 자비가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말이야."

그는 마치 구걸하는 이에게 빵 조각을 던져주는 것처럼 오만한 태도로 제안을 건넸다. 윤슬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지분 일부. 그것만 있다면 그녀는 더 이상 도망자처럼 살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것은 준우가 던진 위험한 미끼라는 사실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준우는 윤슬의 침묵을 긍정으로 해석했는지,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압박의 수위를 높였다. 그는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대고 낮게 읊조렸다.

"생각할 시간이 많지 않아. 판사가 너를 호출하는 순간, 네 선택은 결정되는 거지. 내 편에 서서 화려한 복귀를 하겠어, 아니면 계속해서 가문의 쓰레기통에 버려진 채 잊혀지겠어? 선택은 네 몫이지만, 결과에 대한 책임도 네 몫이라는 걸 명심해."

그의 말은 달콤한 유혹이라기보다 노골적인 협박에 가까웠다. 준우는 윤슬이 지금 얼마나 벼랑 끝에 서 있는지, 그리고 자신이 쥐고 있는 권력이 얼마나 절대적인지를 상기시켰다. 그는 윤슬이 자신의 손바닥 위에서 춤추는 인형에 불과하다고 믿었다. 지분이라는 당근을 제시했지만, 그 뒤에는 언제든 그녀를 짓밟을 수 있는 채찍이 숨겨져 있었다. 윤슬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감정을 억눌렀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수만 가지의 계산이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준우가 요구하는 증언은 간단했다. 횡령과 배임의 실질적인 결정 과정에서 윤슬이 관여했다는 정황을 덮고, 모든 책임이 경영상의 판단 착오였음을 시인하는 것. 그렇게 되면 준우는 법적 망에서 빠져나가 그룹의 경영권을 공고히 할 것이고, 윤슬은 그 대가로 약간의 금전적 이득과 명예를 회복하는 척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준우의 왕국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주는 보조 장치가 되는 일이었다. 윤슬은 자신이 그 왕국의 신하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윤슬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준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 서려 있던 불안함은 어느새 사라지고, 대신 순종적인 빛이 감돌았다. 그것은 철저히 계산된 연기였다. 그녀는 일부러 힘없는 목소리로, 하지만 확신에 찬 어조로 대답했다.

"...알겠어요. 오빠 말대로 할게요. 제가 뭘 어떻게 말해야 할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세요."

준우의 눈에 만족감이 스쳤다. 그는 예상보다 쉽게 굴복한 윤슬의 태도에 쾌감을 느끼는 듯했다. 그는 승리자의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였다. 그 손길은 다정함보다는 소유욕에 가까웠다. 그는 윤슬이 이제 완전히 자신의 통제 아래 들어왔다고 확신했다. 지분이라는 작은 미끼 하나에 상속녀의 자존심을 버린 가련한 여자. 준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역시 넌 영리해, 윤슬아. 그래야 내 동생답지. 변호인단이 이미 가이드라인을 잡아놨으니, 넌 그저 읽는 대로 말하기만 하면 돼.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 넌 그저 네 자리를 되찾는 것만 생각하라고."

윤슬은 그의 말에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준우는 그 미소가 안도감에서 비롯된 것이라 믿었지만, 사실 그것은 포식자를 앞에 둔 사냥꾼의 미소였다. 그녀는 준우가 자신을 믿게 만드는 것이 현재로서는 가장 효율적인 전략임을 알았다. 그가 방심하는 순간, 그 틈을 파고들어 심장을 찌를 준비를 해야 했다. 그녀는 준우의 제안을 수락하는 척하며 그의 경계심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준우는 만족스럽게 몸을 돌려 법정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이제 모든 판이 자신의 뜻대로 짜였다고 믿으며 당당한 걸음걸이로 피고인석으로 향했다. 윤슬은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승리를 확신하며 걷는 저 등이 얼마나 위태로운 것인지 그는 꿈에도 모를 것이다. 윤슬은 손에 쥔 서류 봉투를 꽉 쥐었다. 지분 양도서라는 이름의 종이 조각이 주는 안도감 따위는 없었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이 거래를 통해 얻는 작은 이득이 아니라, 준우가 자신을 '믿게' 만들었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이제 남은 것은 증인석에 오르는 일뿐이었다. 법정의 문이 열리고, 재판장이 입정했다. 장내에는 긴장감이 감돌았고, 방청석의 시선이 일제히 피고인과 증인석으로 쏠렸다. 윤슬은 차분하게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가문에서 버려진 가련한 피해자가 아니었다. 자신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적의 심장부로 걸어 들어가는 도박사였다.

"증인 원윤슬, 출석하십시오."

법원 서기의 호출이 울려 퍼졌다. 윤슬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증인석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구두 소리가 법정의 정적을 깨뜨리며 규칙적으로 울렸다. 준우는 그녀를 바라보며 가벼운 윙크를 보냈고, 윤슬은 그에게 화답하듯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내면에서는 이미 거대한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준비는 끝났다. 이제 그녀는 준우가 설계한 각본 위에서, 자신만의 반전을 써 내려갈 준비를 마쳤다.

증인석에 오른 윤슬은 차분하게 선서를 마쳤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판사가 아닌, 변호인석에 앉아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는 서준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준우는 그녀가 자신이 설계한 대로, 적당히 거짓 증언을 섞어 자신에게 유리한 판결을 끌어낼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윤슬은 잠시 말을 고르는 척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 찰나의 순간,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준우의 보좌관이 실수로 책상 위에 살짝 노출시킨 서류 뭉치였다. 법정의 소음과 긴장감 속에서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윤슬의 예리한 시력은 그 서류의 상단에 적힌 '증인 신빙성 탄핵 및 책임 전가 방안'이라는 문구를 놓치지 않았다.

그것은 단순한 참고 자료가 아니었다. 준우가 변호인단과 치밀하게 짜놓은 함정이었다. 서류의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윤슬이 증언을 마치는 순간, 준우는 미리 준비한 가짜 회계 장부와 이메일 기록을 제출해 그녀를 단순한 증인이 아닌, 이번 비리의 실질적인 주동자이자 공범으로 몰아넣을 계획이었다. 상속 지분을 돌려주겠다는 약속은 그녀를 증인석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달콤한 미끼였을 뿐, 실제로는 모든 법적 책임을 그녀에게 덮어씌우고 자신은 깨끗하게 세탁하여 그룹의 경영권을 독점하려는 계산이었다. 윤슬은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배신감보다는 차가운 확신이 그녀를 지배했다. 준우는 그녀를 과소평가했다. 그녀가 그저 돈과 권력에 목마른 가련한 상속녀라고 믿었던 것이 그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이제 윤슬에게 남은 선택지는 준우의 각본대로 움직여 파멸하거나, 판 자체를 뒤엎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준우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그는 승리를 확신하는 오만한 눈빛이었다. 윤슬은 속으로 비웃으며 생각했다. '네가 판 함정이 얼마나 깊은지 이제 알겠어. 하지만 그 함정에 빠질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야.' 그녀는 심호흡을 하며 마이크 앞에 다가섰다. 목소리는 떨림 없이 단단했다. 하지만 여기서 무작정 폭로하는 것은 위험했다. 준우의 변호인단은 이미 모든 방어막을 쳐놓았을 것이다. 그 견고한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내부의 균열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균열의 중심에는 준우가 가장 신뢰하는 칼이자, 윤슬이 가장 잘 아는 남자, 강태윤이 있었다.

휴정 시간이 선언되자마자 윤슬은 빠르게 복도로 나섰다. 그녀의 발걸음은 망설임 없이 강태윤이 대기하고 있는 변호인 대기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정갈한 수트 차림의 태윤이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그는 윤슬이 들어오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충돌했다. 한때 서로의 전부였으나, 이제는 적의 진영에서 서로를 마주해야 하는 잔인한 관계였다. 태윤의 눈동자에는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준우의 변호사로서의 냉철함 뒤에 숨겨진, 지우지 못한 그리움과 죄책감이 엿보였다.

"여기서 널 보는 건 예상 밖이군."

태윤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지만, 끝부분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윤슬은 그 떨림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 책상 위에 손을 얹었다. 아주 가까운 거리까지 접근하자, 태윤의 호흡이 순간적으로 멎는 것이 느껴졌다. 윤슬은 일부러 나른하면서도 도발적인 미소를 지으며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 태윤이 느끼는 직업적 윤리보다 더 강렬한 개인적 갈망을 자극해야 했다.

"태윤 씨, 아직도 준우 오빠가 당신을 믿는다고 생각해요? 아니면, 당신이 준우 오빠를 믿고 있는 건가요?"

윤슬의 질문에 태윤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 서류로 시선을 돌렸지만, 윤슬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태윤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그가 준비한 '책임 전가' 서류, 당신도 봤겠죠. 당신이 짠 전략이겠지만, 그 끝에 내가 버려질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침묵하는 게 당신이 말하던 정의인가요?" 태윤의 손끝이 멈췄다. 그는 윤슬이 그 서류의 존재를 알 리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예상치 못한 정보의 노출은 태윤의 평정심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태윤은 잠시 침묵하다가 낮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는 윤슬을 밀어내려 했지만, 그녀의 눈 속에 담긴 확신과 슬픔이 뒤섞인 빛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는 준우의 충직한 변호사였지만, 동시에 윤슬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남자였다. 준우가 그녀를 공범으로 몰아넣으려는 계획을 세웠을 때, 태윤 역시 내심 불편함을 느꼈다. 하지만 변호사로서 의뢰인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강박이 그를 짓눌러왔다. 윤슬은 그 갈등의 틈새를 정확히 파고들었다. 그녀는 태윤의 넥타이를 아주 살짝, 스치듯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배신하며 여기까지 왔어요. 하지만 이번만큼은 함께 배신해 보는 게 어때요? 준우 오빠가 아니라, 우리를 가둔 이 지독한 각본을 배신하는 거죠."

그녀의 제안은 위험했다. 태윤에게는 직업적 배임이자 커리어의 도박이었다. 하지만 윤슬의 손길과 목소리는 그가 오랫동안 잊으려 애썼던 기억들을 깨웠다. 태윤은 그녀를 바라보며 깨달았다. 그녀는 지금 단순히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이용해 판을 뒤흔들려는 치밀한 계산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위험한 도박에 가담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것이 사랑인지, 아니면 준우의 오만함에 대한 반발인지 그는 알 수 없었다.

"내가 뭘 해주길 바라지?"

태윤의 짧은 대답은 사실상 항복 선언과 같았다. 윤슬의 입가에 승리자의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태윤의 가슴 팍에 손을 얹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준우 오빠가 숨겨둔 진짜 내부 문서. 그게 어디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빼낼 수 있는지 당신이 알려줘요. 그럼 이 재판의 끝에서, 당신이 원하는 보상을 줄게요." 윤슬은 이제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강태윤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손에 넣었고, 이를 통해 준우가 설계한 유리 성을 산산조각 낼 준비를 마쳤다.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긴장감과 동맹의 기류가 흐르는 가운데, 다시 법정으로 돌아가라는 호출 벨이 울렸다.

법정으로 돌아가는 복도는 숨 막히게 고요했다. 윤슬은 태윤과 거리를 두었지만, 그와 나누었던 밀약의 열기가 여전히 피부에 남아 있었다. 그녀는 멈춰 서서 태윤을 돌아보며 낮고 서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준우 오빠가 보여준 미소, 그게 진짜라고 생각해요? 그는 지금 당신을 변호사가 아니라, 자신의 오물을 닦아낼 걸레로 쓰고 있는 거예요.” 태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서준우의 전담 변호사로서 그가 가진 권력의 실체를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동시에 그 권력이 얼마나 추악한 거짓 위에 세워졌는지도 짐작하고 있었다.

윤슬은 한 걸음 더 다가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가 숨긴 내부 문서는 단순한 장부가 아니에요. 당신조차 모르는, 혹은 알면서도 외면했던 서진 그룹의 치명적인 약점이죠. 그걸 세상에 내놓는 순간 준우 오빠의 유리 성은 깨지겠지만, 당신은 그 파편 속에서 진짜 자유를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나를 돕는 건 배신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구하는 일이에요.” 태윤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의뢰인에 대한 직업적 충성심과 오래전 가슴에 묻어두었던 윤슬을 향한 그리움, 그리고 정의라는 명분 사이에서 그는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윤슬의 눈 속에 담긴 확신과 갈망은 그가 외면해온 진실을 정면으로 응시하게 만들었다.

결국 태윤은 짧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이 감당해야 할 리스크를 계산했지만, 더 이상 준우의 꼭두각시로 남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더 컸다. “내일 새벽, 당신이 지정한 장소로 보내겠어요. 하지만 이건 도박이에요. 만약 준우가 눈치챈다면 우린 둘 다 끝장일 겁니다.” 윤슬은 희미하게 웃었다. “도박이라면 자신 있어요. 판돈이 내 인생 전부니까.”

약속된 시간, 윤슬의 손에는 태윤이 건넨 USB와 서류 뭉치가 쥐어져 있었다. 그것은 서준우가 그토록 철저하게 은폐하려 했던 비자금 세탁 경로와 이사회 조작 증거가 담긴 결정적인 내부 문서였다. 서류의 내용을 훑어내리는 윤슬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이제 그녀는 단순히 쫓겨난 상속녀가 아니라, 준우의 목줄을 쥔 포식자가 되었다. 태윤은 서류를 넘겨준 직후부터 극심한 불안감에 휩싸였지만, 윤슬의 단호한 표정을 보며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믿으려 애썼다.

그러나 승리의 예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법정으로 다시 출근한 윤슬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예상치 못한 준우의 태도였다. 평소처럼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있던 준우는, 이번에는 기이할 정도로 차분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맞이했다. 그는 윤슬이 지나갈 때 슬쩍 팔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쥐었다. 겉으로는 다정한 남매의 모습이었지만, 어깨를 누르는 손가락 끝에는 서늘한 압박감이 실려 있었다.

준우는 그녀의 귓가에 낮게 읊조렸다. “슬아, 요즘 주변 정리를 너무 열심히 하는 것 같더라. 특히 내가 아끼는 사람들과 너무 가깝게 지내는 건 위험해. 변호사는 의뢰인의 비밀을 지키는 게 일이지만, 때로는 그 비밀이 독이 되어 돌아오기도 하거든.” 윤슬은 순간 몸이 굳었지만, 애써 태연한 척 그를 바라보았다. 준우의 눈은 웃고 있었지만, 그 너머에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확신과 함께 잔인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 그는 이미 태윤의 움직임을 짐작하고 있었거나, 혹은 윤슬의 수를 읽고 덫을 놓은 상태였다.

준우의 압박은 집요했다. 그는 윤슬이 증인석으로 향하기 전, 복도 구석으로 그녀를 밀어붙이며 심리적인 포위망을 좁혀왔다. “네가 뭘 손에 넣었든, 그걸 터뜨리는 순간 너 역시 공범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 내가 짠 판에서 네가 살아남을 방법은 단 하나뿐이야. 내 발밑에서 고분고분하게 굴며 내가 주는 떡고물을 받아먹는 것.” 준우의 목소리는 이제 명령에 가까웠다. 그는 윤슬이 가진 증거가 강력할수록, 그것을 공개했을 때 그녀가 짊어져야 할 법적 책임 또한 무거워지도록 이미 정교한 설계를 마친 상태였다.

윤슬은 그의 강압적인 태도에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차갑게 응수했다. “공범이라니, 나는 그저 진실을 찾는 것뿐이에요. 오빠가 만든 가짜 진실 말고, 진짜 서류에 적힌 진실 말이에요.” 준우의 미간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윤슬이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내심 당혹감을 느꼈지만, 겉으로는 여유로운 척 코웃음을 쳤다. “진실? 이 바닥에 그런 게 어디 있어. 승자가 만드는 게 곧 진실이지. 네가 그 서류를 꺼내는 순간, 너는 내 적이 아니라 내 ‘사냥감’이 되는 거야.”

두 사람 사이의 공기는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날카로웠다. 준우의 경고는 단순한 겁주기가 아니라 실질적인 위협이었고, 윤슬은 그 위협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반격의 타이밍을 쟀다.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했다는 안도감과, 그것을 사용했을 때 닥쳐올 후폭풍에 대한 공포가 공존했다. 하지만 윤슬은 이제 물러설 곳이 없었다. 그녀는 준우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증인석을 향해 당당히 걸음을 옮겼다. 이제 남은 것은 이 무기를 언제, 어떻게 휘둘러 준우의 심장을 찌르느냐 하는 문제뿐이었다.

법정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고, 방청석의 시선은 모두 증인석에 선 윤슬에게 쏠렸다. 준우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모든 시나리오를 짜놓았다고 확신했다. 윤슬이 자신의 지분을 되찾기 위해 적당히 타협하고,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충성스러운’ 증언을 내놓을 것이라는 오만한 믿음이었다. 판사가 증인에게 진술을 요청하자, 윤슬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준우와 눈을 맞췄다. 그 눈빛에는 복종이 아닌, 서늘한 심판의 기운이 서려 있었다.

“피고인 서준우 씨가 주장하는 자금 흐름은 사실과 다릅니다.”

윤슬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명확하게 울려 퍼졌다. 준우의 미소가 미세하게 떨렸다. 윤슬은 품 안에서 서류 봉투를 꺼내 재판장에게 제출했다. 그것은 준우가 그토록 숨기려 했던, 횡령 자금의 실제 흐름과 비자금 세탁 경로가 상세히 기록된 원본 장부였다. 법정 내에 작은 웅성거림이 일었다. 준우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다. 그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이게 대체 어디서 난 거야! 원윤슬, 너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지?”

준우는 다급하게 고개를 돌려 자신의 변호인인 태윤을 바라보았다. 그는 태윤이 능숙하게 이 상황을 수습해 줄 것이라 믿었다. 태윤이 평소처럼 법리적 허점을 찾아내어 증거의 효력을 부정하거나, 윤슬의 진술을 깎아내릴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준우는 간절함이 섞인 눈빛으로 태윤에게 신호를 보냈다. ‘빨리 수습해, 강 변호사!’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하지만 태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냉정한 표정으로 서류를 훑어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재판장님, 피고인 측 변호인으로서 본 증거의 진위 여부를 확인했습니다. 이 장부는 피고인이 은밀히 조작해온 회계 자료의 원본이며, 그동안 피고인이 주장해온 무죄 논리는 이 문서 앞에서 완전히 무색해집니다.”

준우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태윤의 입에서 나온 말은 방어가 아니라 사실상의 ‘배신’이자 ‘폭로’였다. 준우는 경악하며 태윤의 팔을 붙잡고 낮게 읊조렸다. “강태윤, 너 지금 미쳤어? 내 변호인이잖아!” 그러나 태윤은 차갑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는 이미 윤슬과 합의하여 준우의 위선을 드러내는 방향으로 전략을 틀었다. 태윤은 더 이상 의뢰인의 거짓말을 포장하는 인형이 아니라, 진실을 밝히는 법조인으로서의 자존심을 선택한 것이었다.

결국 준우는 횡령 및 증거 조작 혐의가 인정되어 그 자리에서 구속되었다. 수갑이 채워지는 순간에도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허망한 표정으로 윤슬을 노려보았지만, 승패는 이미 결정 난 뒤였다. 법적 공방이 마무리된 후, 윤슬은 그동안 빼앗겼던 상속 지분의 상당 부분을 공식적으로 회복했다. 유리 성처럼 위태롭고 가식적이었던 준우의 제국이 무너진 자리에서, 그녀는 비로소 자신의 진짜 이름을 되찾았다.

재판장을 나서는 윤슬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법원 로비의 밝은 햇살이 그녀의 어깨 위로 쏟아졌다. 그 뒤를 따라오던 태윤이 그녀의 곁에 멈춰 섰다. 그는 자신의 커리어를 걸고 위험한 도박을 했지만, 후회하는 기색은 없었다. 윤슬은 잠시 망설이다가,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던진 태윤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맞닿은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온기는 단순한 동맹의 증거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랜 시간 서로를 그리워하며 쌓아온 상처를 보듬는 위로였고, 이제는 누구의 조종도 받지 않는 진정한 삶의 주도권을 되찾았다는 희망의 약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