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테르나의 중심부에 위치한 ‘영원의 회랑’은 중력이 희박해 발걸음마다 몸이 가볍게 붕 떴다. 지우는 자신의 숨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적막 속에서 카엘을 마주했다. 카엘은 이 정원의 정점에 선 최고 관리자였다. 그는 창백할 정도로 흰 피부와 깊이를 알 수 없는 무채색의 눈동자를 지닌 사내로, 그가 걸친 긴 예복은 정원의 공기 속에 부유하는 미세한 꽃가루들로 인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카엘은 지우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손에 든 투명한 크리스털 서판을 내밀었다. 그곳에는 이 정원에 발을 들이려는 모든 신입이 거쳐야 하는 엄숙한 서약서가 적혀 있었다.
“이곳은 단순히 식물을 가꾸는 곳이 아닙니다, 지우 씨. 우리가 보존하는 것은 사라져 버린 이들의 조각, 즉 기억입니다.”
카엘의 목소리는 낮고 서늘했지만,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다정함을 품고 있었다. 지우는 갈망했다.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 채 궤도를 떠돌던 외로운 영혼에게, 누군가의 기억을 지키고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제안은 구원과도 같았다. 카엘은 ‘기억의 수호’라는 공적인 약속의 의미를 설명했다. 그것은 정원에 피어난 꽃들이 시들지 않도록 정성을 다해 보살피고, 그 속에 깃든 죽은 자들의 이야기를 영원히 수호하겠다는 맹세였다. 지우는 망설임 없이 서판 위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그 순간, 지우는 비로소 자신이 돌아갈 곳을 찾았다는 안도감에 휩싸였다.
서약을 마친 지우가 카엘의 안내를 받아 회랑 밖으로 나서자,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에테르나의 정원은 지상의 그 어떤 화원과도 달랐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모호한 돔 아래로, 수천, 수만 송이의 꽃들이 중력을 무시한 채 허공에 떠다니거나 기괴하게 얽힌 덩굴을 따라 늘어져 있었다. 꽃들의 색깔은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다채로웠다. 어떤 꽃은 타오르는 태양처럼 붉었고, 어떤 꽃은 깊은 심해의 어둠을 닮은 보라색이었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것은 그 꽃들이 내뿜는 빛이었다. 꽃잎 하나하나가 미세하게 진동하며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의 심장박동처럼 일정한 리듬을 타고 있었다.
지우는 홀린 듯 손을 뻗어 근처에 떠다니는 은백색 꽃잎 하나를 건드렸다. 그 순간, 머릿속으로 낯선 이의 기억이 파편처럼 스쳐 지나갔다.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한 웃음소리, 누군가를 간절히 그리워하며 흘렸던 눈물의 온기, 그리고 생의 마지막 순간에 느꼈던 짧은 평온함까지. 그것은 단순한 환각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했던 누군가의 삶이 응축된 결정체였다. 지우는 전율했다. 죽음조차 갈라놓지 못한 기억들이 꽃이 되어 피어나는 이 신비로운 공간에서, 자신은 이제 그 기억들의 파수꾼이 된 것이다. 이곳의 아름다움은 지우의 영혼을 완전히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카엘은 감탄에 젖은 지우의 곁으로 다가와 나지막이 덧붙였다. “보시다시피, 이곳의 꽃들은 매우 섬세합니다. 기억은 본래 휘발되기 쉬운 법이라, 정원사의 세심한 보살핌이 없다면 금세 빛을 잃고 바스러지죠. 당신이 맺은 약속은 바로 이 숭고한 소멸을 막겠다는 다짐입니다.” 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원의 풍경은 압도적이었고, 그 속에서 느껴지는 고요한 질서는 지우가 평생 찾아 헤맨 완벽한 소속감을 제공했다. 다른 정원사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꽃들을 다듬는 모습조차 지우의 눈에는 성스러운 의식을 수행하는 사제들처럼 보였다.
지우는 자신이 맡게 될 구역으로 안내받으며, 정원의 구석구석을 살폈다. 빛나는 꽃잎들이 겹겹이 쌓인 길을 지날 때마다 누군가의 삶이 속삭이는 듯한 환청이 들려왔다. 지우는 이 거대한 기억의 도서관 속에서 자신이 기여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는 사실에 가슴 벅찬 희열을 느꼈다. 카엘이 말한 ‘보살핌’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 정성이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꽃들에게 전달되는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이 아름다운 세계의 일부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지우는 자신의 이름이 적힌 정원사 배지를 가슴에 달며, 이곳에서 영원히 머물고 싶다는 강렬한 소망을 품었다.
하지만 정원의 찬란한 빛 뒤에는 기묘한 위질감이 숨어 있었다. 지우는 문득 깨달았다. 정원을 가꾸는 다른 신입 정원사들의 안색이 유난히 창백하다는 것을. 그들은 분명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눈가에는 지울 수 없는 피로감이 서려 있었다. 마치 아주 오랜 시간 잠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처럼, 그들의 움직임은 느릿하고 무거웠다. 그러나 지우는 그것을 단순히 기억의 무게를 견디는 이들의 숙명이라고 생각했다. 카엘은 지우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으며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자애로웠지만, 동시에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듯 서늘한 구석이 있었다.
“이제 당신은 에테르나의 가족입니다. 기억의 수호자로서 당신의 소임을 다해주길 바랍니다.”
카엘의 말과 함께 지우는 정식으로 정원사 업무에 투입되었다. 지우는 자신에게 배정된 꽃들 사이를 거닐며, 그들이 내뿜는 황홀한 향기에 취했다. 꽃들은 지우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더욱 밝게 빛나는 듯했고, 지우는 그 반응에 만족하며 정성껏 잎사귀를 닦아냈다. 이 정원을 유지하기 위해 무엇이 소모되고 있는지, 꽃들이 피워내는 그 찬란한 빛의 연료가 어디서 오는지는 아직 알지 못한 채, 지우는 그저 자신이 찾은 이 낙원에 깊이 침잠해 들어갔다. 소속감이라는 달콤한 마취제는 지우의 감각을 무디게 만들었고, 그는 자신이 맺은 약속이 가져올 대가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지우는 매일 아침 배정된 구역의 꽃들을 돌보는 일로 하루를 시작했다. 은하수의 파편처럼 반짝이는 꽃잎들은 지우가 다가가기만 해도 가볍게 떨리며 환영의 인사를 건네는 듯했다. 처음에는 그저 신비로운 생명 현상이라고만 생각했다. 꽃들은 죽은 자의 기억을 머금고 있었기에, 그들이 품은 그리움과 사랑이 지우의 다정한 손길에 반응하는 것이라 믿었다. 지우는 정성스럽게 잎사귀에 맺힌 이슬을 닦아내고, 시들기 시작한 줄기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럴 때마다 꽃들은 더욱 찬연한 빛을 뿜어냈고, 정원 전체를 감싸는 향기는 더욱 짙고 달콤해졌다. 지우는 자신이 이 거대한 기억의 저장소에 꼭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는 생각에 벅찬 만족감을 느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정원을 가꾸는 즐거움 뒤로 묘한 위화감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지우는 업무를 마칠 때마다 형용할 수 없는 피로감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단순한 육체적 노동으로 인한 고단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영혼의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가 조금씩 깎여 나가는 듯한, 서늘하고 공허한 감각이었다. 잠을 자고 일어나도 피로는 가시지 않았고, 오히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안색이 하루가 다르게 창백해지는 것을 발견했다. 손끝은 늘 차가웠으며, 가끔 이유 없이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빈혈 증세가 나타났다. 지우는 그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오는 일시적인 과로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몸이 보내는 신호는 점점 더 구체적이고 명확해졌다.
이상 현상은 꽃들이 유독 시들해 보일 때 심해졌다. 어느 오후, 지우는 자신의 구역에서 유독 빛을 잃고 고개를 숙인 푸른색 꽃 한 송이를 발견했다. 그 꽃은 누군가의 애절한 첫사랑의 기억을 품고 있다는 기록이 있었다. 지우는 안타까운 마음에 꽃잎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그 순간, 지우는 자신의 손끝에서부터 보이지 않는 가느다란 실 같은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기괴한 감각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혈관 속의 온기가 강제로 끌려 나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지우가 당혹감에 손을 떼려 했지만, 꽃은 마치 갈증에 허덕이는 짐승처럼 지우의 생명력을 강렬하게 빨아들였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지우는 온몸의 힘이 쭉 빠져나가는 강한 현기증을 느꼈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든 지우의 눈에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쳐졌다. 방금 전까지 시들어 죽어가던 푸른 꽃이, 지우의 생기를 흡수한 뒤 거짓말처럼 다시 활짝 피어난 것이었다. 꽃잎은 이전보다 훨씬 더 선명한 푸른빛을 띠며 오만하게 빛나고 있었다. 지우는 자신의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피부는 더욱 투명해져 푸르스름한 혈관이 훤히 비쳤고, 손끝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이것은 단순한 정원 가꾸기가 아니었다. 꽃들이 빛을 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물이나 햇빛이 아니라, 정원사가 가진 살아있는 생명력 그 자체였다.
혼란에 빠진 지우는 정원의 다른 구역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디테일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정원을 거니는 다른 정원사들의 모습이 예전처럼 활기차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걸음걸이는 무거웠고, 눈동자에는 생기 대신 깊은 체념과 공허함이 서려 있었다. 어떤 이는 벽에 기대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어떤 이는 자신의 창백한 손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지우는 깨달았다. 이곳의 모든 정원사가 각자의 구역에서 서서히 말라가고 있다는 사실을. 에테르나가 유지하는 그 찬란한 아름다움은 사실 산 사람의 생명을 제물로 바쳐 죽은 자의 기억을 박제하는 잔혹한 등가교환의 결과물이었다.
지우는 카엘과 맺었던 '기억의 수호'라는 서약을 떠올렸다. 그때는 그 말이 숭고한 사명감처럼 들렸지만, 이제는 그것이 거대한 덫처럼 느껴졌다. 수호한다는 것은 단순히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깎아 그 기억의 불꽃을 유지시키는 노동을 의미했다. 카엘은 이 사실을 교묘하게 숨긴 채 지우에게 소속감이라는 달콤한 미끼를 던졌다. 정원의 안락함과 평화로운 분위기는 정원사들의 생명력을 천천히 갈아 넣기 위해 설계된 정교한 마취제였던 셈이다. 지우는 자신이 들어온 곳이 낙원이 아니라, 살아있는 채로 서서히 소모되는 거대한 무덤이라는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
공포는 곧 생존에 대한 절박한 위기감으로 변했다. 지우는 자신이 얼마나 더 오래 버틸 수 있을지 가늠해 보려 했지만, 기준점이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꽃들이 더 밝게 빛날수록 자신의 수명은 더 빠르게 줄어들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정원의 꽃들이 내뿜는 향기가 이제는 달콤한 유혹이 아니라, 포식자가 내뿜는 페로몬처럼 느껴져 구역질이 났다. 지우는 자신의 손끝에서 빠져나갔던 생명력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한 번 꽃에게 바쳐진 생기는 영원히 죽은 자의 기억 속에 귀속되어, 그들의 화려한 외형을 유지하는 연료가 될 뿐이었다.
지우는 문득 카엘의 온화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 뒤에 숨겨진 냉혹한 계산과 효율성이 느껴져 몸서리가 쳐졌다. 이제 지우에게 남은 것은 정원사로서의 자부심이 아니라, 어떻게든 이 소모적인 굴레에서 벗어나 살아남아야 한다는 본능적인 갈망뿐이었다. 하지만 이미 서약을 맺어 정원의 일부가 된 이상, 쉽게 이곳을 떠날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지우를 짓눌렀다. 화려하게 만개한 꽃들 사이에서 지우는 처음으로 지독한 고립감을 느꼈다. 주변의 모든 아름다움이 자신의 생명을 갉아먹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정원사의 눈에, 이제 정원은 더 이상 낙원이 아닌 거대한 포식자의 입속처럼 보였다.
지우는 정원의 화려한 외피 아래 숨겨진 갈증을 읽어낸 다른 이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 믿었다. 매일 아침, 꽃들의 빛깔이 더욱 선명해질수록 안색이 창백해지는 동료 신입 정원사들의 얼굴에서 그는 동질감을 발견했다. 지우는 조심스럽게 그들에게 다가갔다. 처음에는 서로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으로 입을 닫았으나, 자신이 겪은 생명력의 소실과 에테르나의 기괴한 메커니즘을 공유하자 그들의 눈빛에 서서히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단순한 적응 과정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자고 일어날 때마다 몸이 납덩이처럼 무거워지는 건 단순한 피로가 아니었어요."
한 신입 정원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고백했다. 그들은 정원의 구석진 그늘, 카엘의 감시가 닿지 않는 작은 벤치에 모여 은밀한 대화를 나누었다. 지우는 그들에게 이 시스템이 단순히 기억을 보존하는 의례가 아니라, 산 자의 생기를 빨아들여 죽은 자의 형상을 유지하는 포식적 구조임을 역설했다. 그들은 더 이상 꽃의 아름다움에 현혹되지 않기로 했다. 지우는 함께 모인 이들과 함께, 생명력을 강제로 추출하는 연결 고리를 끊어내거나 시스템 자체를 재설계할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정원사로서의 의무를 저버리는 배신일 수도 있었지만, 동시에 인간으로서 생존하기 위한 유일한 저항이었다. 그들은 각자가 맡은 구역의 생태 데이터를 수집하며, 시스템의 핵심 제어 장치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무력화할 수 있는 임계점이 어디인지를 치밀하게 계산했다. 고립된 공포는 연대를 통해 작은 희망으로 변모했고, 지우는 처음으로 이 정원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들의 연대는 생각보다 쉽게 균열을 맞이했다. 에테르나에는 신입뿐만 아니라, 이미 수십 년간 이곳의 체계에 순응하며 살아온 기존 정원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카엘이 제공하는 안락함과 권위, 그리고 '기억의 수호자'라는 명예로운 지위에 길들여진 자들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지우의 계획은 정원의 평화를 깨뜨리는 불온한 소동에 불과했다. 특히 카엘의 총애를 받는 선임 정원사들은 신입들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생명력의 소실은 이미 당연한 대가였으며, 오히려 그것을 바침으로써 얻는 사회적 지위와 영적인 충만함이 더 중요했다.
"젊은 혈기가 지나치군. 이 정원이 유지되는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단순히 손해와 이익으로만 계산하다니 가엾어라."
어느 날, 지우가 동료들과 함께 시스템의 취약점을 논의하던 중 선임 정원사 중 한 명이 냉소적인 말투로 끼어들었다. 그는 지우의 주장을 비웃으며, 카엘의 방식이야말로 가장 숭고한 사랑의 형태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경멸과 함께 묘한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기존 구성원들은 지우의 계획이 성공하여 시스템이 변한다면, 자신들이 누려온 기득권과 안락한 삶이 사라질 것이라는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결국, 그들은 지우의 움직임을 카엘에게 밀고했다. 단순한 보고를 넘어, 그들은 지우와 그 일행이 정원의 질서를 파괴하려 한다는 프레임을 씌워 그들을 조직적으로 고립시키기 시작했다. 동료였던 이들이 어느덧 감시자가 되어 지우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고 보고하는 광경은, 그 어떤 기계적인 시스템보다 더 잔혹하게 지우의 숨통을 조여 왔다.
카엘의 압박은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다가왔다. 어느 날 오후, 지우는 자신의 관리 구역으로 돌아왔을 때 평소보다 훨씬 더 강렬한 갈증과 무력감을 느꼈다. 꽃들이 평소보다 더 붉게 타오르고 있었고, 그 빛은 지우의 생명력을 평소의 몇 배나 빠른 속도로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것은 명백한 경고였다. 시스템을 건드리려 한 대가로, 카엘이 그가 맺은 '기억의 수호'라는 약속의 구속력을 강제로 끌어올린 것이었다. 지우는 바닥에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자신을 둘러싼 꽃들이 이제는 아름다운 장식이 아니라 자신을 옭아맨 쇠사슬처럼 보였다.
함께 계획을 세웠던 신입 정원사들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각자의 구역에서 원인 모를 쇠약함에 시달렸고, 기존 정원사들의 차가운 시선 속에서 심리적 압박감에 짓눌렸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없었다. 순응하여 서서히 말라 죽거나, 아니면 모든 것을 걸고 시스템을 파괴하는 도박을 하는 것뿐이었다. 지우는 창백해진 손으로 흙을 움켜쥐며 결심했다. 적당한 타협이나 점진적인 변화는 불가능했다. 카엘이 설계한 이 잔혹한 낙원은 오직 완전한 파괴를 통해서만 그 실체를 드러낼 것이었다.
"결국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야."
지우는 비밀리에 모인 동료들에게 낮게 속삭였다. 그들의 얼굴에는 이제 희망보다는 처절한 생존 본능과 독기가 서려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 정원사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이 거대한 포식자의 심장을 찔러 멈추게 할 파괴자가 되기로 했다. 고립된 정원의 한구석에서, 지우와 소수의 동료들은 시스템의 완전한 붕괴라는 최후의 수단을 강구하며 어둠 속에서 칼날을 갈았다.
정원의 심장부, 기억의 뿌리가 얽혀 거대한 혈관처럼 꿈틀거리는 지하 공간에 도착했을 때 지우와 동료들의 호흡은 거칠어져 있었다. 그들은 각자의 손에 쥔 날카로운 도구를 꽉 쥐며, 시스템의 중추를 끊어내기 위해 전진했다. 지우는 앞장서서 뿌리의 가장 깊은 핵을 가리켰다. 이곳만 도려낼 수 있다면 카엘이 지배하는 이 기괴한 순환 고리를 끊고, 더 이상 누군가의 생명력을 갈아 넣지 않아도 되는 진정한 자유를 찾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그들이 핵에 손을 뻗은 순간, 정원의 바닥에서 갑자기 투명한 덩굴들이 솟구쳐 올라 동료들의 발목과 손목을 낚아챘다. 비명 소리가 지하 공간을 가득 채웠으나, 그 소리는 곧 기괴할 정도로 고요한 정적 속에 묻혀버렸다. 어둠 속에서 카엘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입가에는 모든 것을 예상했다는 듯한 서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는 당황한 지우를 향해 나직하게 속삭였다.
"파괴란 곧 새로운 창조의 밑거름이 되는 법이지. 너희의 그 헛된 저항마저도 이 정원에는 아주 훌륭한 영양분이 될 거야."
카엘의 손짓 한 번에 덩굴들은 더욱 거세게 동료들을 조여 왔고, 그들의 몸에서 빛나는 생명력이 강제로 추출되어 뿌리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지우가 절규하며 동료들을 구하려 달려들었지만, 이미 늦어 있었다. 동료들의 육체는 서서히 말라갔고, 그들이 서 있던 자리에는 그들의 비명과 절망이 응축된 작은 꽃송이들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함께 연대하며 미래를 꿈꿨던 이들이 순식간에 정원의 소모품인 거름으로 전락하는 광경을 지우는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홀로 남겨진 지우의 주변으로 동료들이 남긴 꽃들이 화려하게 피어올랐다. 그 꽃들은 역설적이게도 그 어느 때보다 생생한 색채를 띠고 있었으며, 그 향기는 지독할 정도로 달콤했다. 카엘은 천천히 다가와 지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의 손길은 다정했으나 그 안에 담긴 의지는 절대적이었다. 지우는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꼈다. 이제 그녀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그토록 갈망했던 소속감,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안도감은 이제 오직 이 죽음의 정원 속에서만 가능했다. 카엘은 그녀의 귓가에 매혹적인 제안을 건넸다.
"지우야, 너만은 특별하게 남겨두마. 네가 원하던 그 영원한 소속감을 주지. 네 스스로 이 정원의 일부가 된다면, 너는 더 이상 외롭지 않을 거야. 너는 이 정원에서 가장 거대하고 아름다운 기억의 꽃이 되어, 영원히 이곳의 중심에서 사랑받게 될 테니까."
지우는 깨달았다. 이 시스템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은 시스템에 완전히 굴복하여 그 부속품이 되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저항의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고립과 소멸뿐이라면, 차라리 화려한 껍데기 속에 갇혀 박제되는 편이 낫겠다는 체념이 그녀를 덮쳤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스스로를 이 정원의 제물로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선택이라기보다, 지독한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비극적인 투항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으며 자신의 모든 기억과 의식을 정원의 뿌리로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내가... 이곳의 일부가 된다면, 정말 더 이상 혼자가 아니게 되는 거죠?"
그녀의 마지막 물음에 카엘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우의 의식이 희미해지며 시야가 하얗게 멀어졌다. 육체의 감각이 사라진 자리에 강렬한 꽃향기가 밀려왔고, 그녀의 발끝부터 서서히 단단한 줄기가 돋아나 몸을 감싸 안았다. 그것은 포근한 포옹 같았으나 동시에 숨통을 조이는 올가미와 같았다. 지우의 자아는 점점 조각나 정원의 거대한 네트워크 속으로 흩어졌고, 그녀가 가졌던 슬픔, 희망, 분노는 모두 투명한 꽃잎의 색깔로 변환되었다. 마침내 그녀가 완전히 사라진 자리에는, 지금까지 에테르나 정원에서 본 적 없는 가장 거대하고 화려한 기억의 꽃 한 송이가 만개했다. 그 꽃은 기괴할 정도로 아름다웠으며, 주변의 다른 꽃들을 압도하는 광채를 뿜어내고 있었다. 지우라는 인간은 사라졌지만, 그녀의 정수만을 추출해 만든 완벽한 장식품이 그곳에 남겨진 것이다.
카엘은 천천히 다가가 그 꽃의 꽃잎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쓸어내렸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꽃이 내뿜는 진한 향기를 만끽했다. 그것은 지우의 영혼이 내뱉는 마지막 신음이자, 시스템이 거둔 완벽한 승리의 전유물이었다. 카엘의 얼굴에는 더할 나위 없는 만족감이 서려 있었다. 그는 이제 이 정원이 한층 더 풍요로워졌음을 느꼈다. 그는 뒤를 돌아 정원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저 멀리서 새로운 호기심과 희망을 품고 이곳을 찾아올 또 다른 신입 정원사들의 발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카엘은 단정한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새로운 제물을 맞이할 준비를 하기 위해 우아한 걸음으로 심장부를 벗어났다. 화려하게 피어난 꽃만이 주인 잃은 정적 속에서 무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